[강영운의 사색(史色)] 개혁군주 혹은 폭력가장 … 푸틴이 칭송한 두얼굴의 차르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11. 1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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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제국 일으켜 세운 표트르 대제

◆ 매경 포커스 ◆

표트르 1세로부터 시작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Florstein(WikiPhotoSpace)

"표트르대제는 21년 동안 스웨덴과 대북방전쟁을 벌였습니다. 러시아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역사적인 가치야말로 우리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입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지난해 열린 표트르대제 탄생 350주년 행사장에서였습니다. 영국 가디언 등 주요 외신은 푸틴이 자신을 러시아제국 초대 황제에 비유했다고 보도합니다.

푸틴에게 표트르는 영웅이었습니다. 유럽의 변방국에 불과했던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키워내는 초석을 닦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푸틴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만든 인물 역시 표트르대제였습니다. 러시아의 영토를 넓히고, 근대적 국가로서 시스템의 바탕을 만든 인물로 통하지요.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푸틴에게 이만한 '롤모델'이 없는 셈이지요.

동시에 표트르는 모순적 인물이었습니다. 러시아를 부강하게 만들면서 아내를 내쫓고 자식을 잔혹하게 고문해 죽였기 때문입니다. 개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러시아를 유럽의 강자로 끌어올린 군주이자 동시에 자신의 가정을 산산조각 낸 냉혹한 가장. 표트르대제의 양면을 소개합니다. 이율배반의 사잇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근원을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마르크 나티에가 그린 표트르 1세 초상화.

태생부터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름뿐인 왕." 비정한 아버지의 가정사부터 돌아봅니다. 표트르는 1672년 러시아 왕손으로 태어났지만, 기반은 미약했습니다. 그가 두 번째 황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어서입니다. 러시아의 왕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이미 첫 황후와 사이에서 왕세자를 둘이나 낳은 상황. 러시아 왕좌를 두고 치열한 정치게임이 벌어지지요. 곡절 끝에 이복형인 이반과 표트르의 공동 즉위가 결정됩니다. 사실상 이복누나 소피아가 실권을 쥐었지요. 그녀가 어린 동생들을 대신해 섭정으로 결정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인 나탈리아는 표트르와 함께 여름별장으로 자주 떠났습니다. 사실상의 피난.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지요. 세상의 중심에서 한 발짝 멀어졌을 때, 비로소 얻는 것들이 있습니다. 표트르 역시 어머니와 여름별장에서 '부국'의 길을 습득합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유럽인들에게서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을 배우면서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었지요. 유럽은 점점 강해지는데, 점점 뒤처져 가는 러시아의 현실을 보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유럽을 배워야 한다. 정치도, 문화도, 우리의 생각까지도."

1689년, 그가 17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사내의 향기가 표트르에게 묻어납니다. 내면은 통찰과 결기로 가득 찼지요. 군주로 보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소피아의 손아귀에서 러시아를 해방하고, 유럽식 강국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표트르가 '친정'을 선언했을 때 많은 귀족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소피아의 자의적 통치에 대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손쉽게 표트르의 시대가 막을 올렸습니다.

유럽식 러시아로 변화를 주도

"러시아식 수염을 깎고 유럽인처럼 콧수염을 기르게."

표트르의 핵심 정책은 '원대한 변화'였습니다. 정치·행정·군사를 유럽식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 의식주 역시 유럽식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여겼지요. 1697년 조선업자로 분장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선진 문물을 몸소 체험한 뒤였습니다. 1698년 9월에는 러시아식 긴 수염과 러시아 전통 의복을 입는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었지요.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정치 행보였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국가는 새 수도를 요구합니다. 그가 새로 점찍은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였지요.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스러운 도시였지요. 러시아의 도시 명칭에 독일식 어미인 '부르크'가 붙은 이유 역시 그가 얼마나 유럽을 선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표트르 기마상. Lite

정치는 순항했지만, 가정은 삐걱거렸습니다. "아내와 아이 빼고 다 바꾸라"는 게 개혁이라지만, 표트르는 아내와 아이까지 바꾸고 싶어했지요. 정략결혼이었던 데다 아내 에우독시아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게 문제였습니다. 유럽 지향적이던 표트르에게 러시아 전통 그 자체인 에우독시아가 곱게 보였을 리가 없었지요. 표트르는 처음부터 정부를 들였고, 에우독시아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다른 여자와 대놓고 잠자리를 가지는 남편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너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사람이란다." 에우독시아의 복수는 자녀 교육을 통해 이뤄집니다. 황태자 알렉세이가 아버지 표트르를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었지요.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 교육을 받도록 고수하면서 표트르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로 키워내고자 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 방법이었지요. 1698년 표트르가 공식적으로 에우독시아와 이혼을 선언합니다. 알렉세이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을 때였지요. 황태자는 표트르를 싫어하는 걸 넘어 혐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영토 확장에 나선 러시아

"가자, 가자, 바다로 가자!"

가정에서 불화가 싹트는 걸 모른 채, 표트르는 개혁에 더욱 집중합니다. 항구를 손에 넣기 위한 군사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지요. 대륙의 복판에 자리 잡은 지리적 요건이 조국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16세기부터 세계사는 바다를 중심으로 흘러갔지요. 표트르는 항구를 손에 넣기로 마음먹습니다. 항구는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자 유럽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창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바다는 발트해와 흑해. 두 거인이 입구를 딱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발트해를 지배하던 스웨덴제국과 흑해의 강자 오스만제국이었습니다. 이제 막 역량이 올라오던 러시아가 비벼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지요.

표트르는 도전하는 군주였습니다. 스웨덴에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내밀었지요. 대북방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스웨덴제국에 앙심이 있던 여러 국가가 러시아에 힘을 보탰습니다. 작은 규모의 세계대전이나 다름없었지요.

교회의 종을 녹이고, 고율의 세금을 걷었습니다. 총과 대포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세계 최강 수준의 스웨덴제국 군대와 정면 승부는 피하고 보급로를 끊는 전략도 빛을 발했지요. 20년의 전쟁에서 미소 지은 건 러시아와 표트르였습니다. 전쟁이 막을 내린 1721년 뉘스타드조약이 체결됩니다. 스웨덴령의 땅 일부를 러시아에 넘긴다는 내용이었지요. 영토 야욕으로 전쟁을 벌인 푸틴이 표트르를 소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러시아는 발트해를 통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표트르의 이름 뒤에는 대제(The Great)가 붙게 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여름궁전 중심부에는 수사자를 죽이는 삼손 조각상이 자리합니다. 스웨덴의 국장이 수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들 고문해 죽인 냉혹한 아버지

전쟁이 마냥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황태자 알렉세이의 죽음. 그는 전장에서 영예롭게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었지요. 아버지 표트르의 명령으로 옥에 갇혀 고문받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북방전쟁에서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늘 기대에 못 미쳤지요. 어쩌면 의도 된 것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어머니를 소박 놓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으니까요.

두 사람 사이가 더 틀어진 건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알렉세이가 아들(훗날 표트르 2세)을 출산한 날이었습니다. 아내 샬롯이 난산 끝에 사망한 것이었지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온 날, 가장 소중한 이가 떠나는 비극. 그때 아버지 표트르대제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지요. "국가의 일에 더욱 관심을 갖길 바란다." 알렉세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두 사람 사이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모반 소문까지 번지기 시작합니다. 알렉세이는 표트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외국에 머물고 있었지요. 표트르는 즉각 귀환을 요구합니다. 알렉세이가 돌아오자 법원에 넘겨버렸습니다. 감옥에서 그를 맞이한 건 끔찍한 구타와 고문. 황태자가 아닌 반역자에 불과했습니다. 표트르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미 사망해버렸기 때문입니다. 1718년 6월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친모인 에우독시아 역시 수녀원으로 강제 감금을 당해야만 했었지요. '러시아판 사도세자'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요.

러시아를 제국으로 일군 대왕의 삶도 시나브로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 1725년 1월 그가 쓰러집니다. 요독증이었습니다. 과로에 과음까지 겹친 탓이었지요. 한 달 뒤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52세라는 짧은 나이.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불과 5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지요.

푸틴이 편집 소환한 표트르

표트르의 죽음은 반(反)개혁을 불렀습니다. 그의 손자인 표트르 2세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였습니다. 손자인 표트르 2세의 아버지는 알렉세이. 표트르대제가 잔혹하게 감옥에서 죽게 만든 바로 그 사람이었지요. 러시아의 역사는 다시금 일대 혼란으로 접어들지요.

러시아가 표트르의 지도 아래 대국으로 성장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능력 중심 인재 정책을 펼친 것도 표트르의 공이었지요.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들여온 물건들입니다.

두 얼굴의 표트르였습니다. 러시아의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군주이자 최악의 아버지이자 뻔뻔한 남편의 전형. 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아내를 학대하고 아들을 죽음에 빠뜨리게 한 모순적 인물입니다. 푸틴이 말하지 않은 또 다른 이면이지요. 역사는 현재 권력에 편집돼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역사 속 알롱달롱한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색(史色)입니다. 소란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역사의 숲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재미 혹은 의미. 두 미(美) 중 하나는 반드시 챙기겠습니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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