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클로 제친다"…1등 넘보는 토종 SPA '탑텐' [양지윤의 왓츠in장바구니]
"한국서 1등 못하면 해외서도 안된다"
“국내 패션업계 패스트패션(SPA) 분야에서 올해 역사가 써질지도 모른다.”
패션·유통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요즘 나오는 얘기다. 토종 SPA 브랜드 ‘탑텐’이 일본 패스트 리테일링의 ‘유니클로’를 제치고 국내 1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 예상 매출은 9000억원. 내년 국내 단일 브랜드로는 최초로 ‘연 매출 1조원’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신성통상이 탑텐을 만든 건 2012년이었다. 유니클로가 2005년, 인디텍스의 ‘자라’가 2008년 한국에 진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참 늦은 출발이다. 그런 탑텐이 출범 10여년 만에 SPA 1등 자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된 데엔 ‘안방을 외국 브랜드에 내주지 않겠다’는 염태순 신성통상 회장의 강한 의지가 원동력이 됐다. 염 회장을 12일 서울 둔촌동 신성통상 본사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년에 국내 브랜드 최초로 연 매출 1조원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국산 패션 브랜드들의 연 매출은 보통 500억~600억원 정도고, 1000억원을 넘기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연 매출 1000억원을 꿈꾸며 정진하는 패션인들에게 ‘열심히 하면 1조원도 할 수 있다’는 새 목표를 제시한 점이 뜻깊습니다.”
▶1983년 창업한 가나안 상사는 가방·텐트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기업이고, 2002년 인수한 신성통상도 니트를 수출하는 의류 OEM 기업이었습니다. OEM 기업이 자체 브랜드로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OEM은 몇 안 되는 고객사만 만족시키면 되지만, 자체 브랜드는 취향이 제각각인 수천만 명의 고객들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또 OEM 기업은 일단 제품을 만들어서 고객사에 넘기면 끝이지만, 자체 브랜드라면 우리가 생산한 모든 제품을 끝까지 책임지고 팔아야 한다는 게 큰 차이겠지요.”
▶일본의 유니클로와 스페인의 자라가 한국에 상륙하고 몇 년 후 탑텐을 론칭했습니다. 국산 SPA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화가 나고 약도 올랐습니다. 한국 브랜드는 1년에 500억~600억원 팔기도 쉽지 않은데 글로벌 SPA들은 우리 안방에서 수천억 원씩 매출을 냈습니다. ‘왜 우리나라 브랜드는 저렇게 못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고 못 할 게 뭐 있냐’는 무대포 정신으로 도전하게 된 것이죠.”
▶‘골리앗’과 경쟁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성공할 거라고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직원들도 ‘말도 안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만큼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SPA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탑텐을 론칭하기까지 딱 두 달 걸렸습니다.
글로벌 브랜드들이 시장을 선점했기 때문에 늦을수록 성공하기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봤습니다. 실수하고, 그걸 보완해나가면서 빨리 따라가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글로벌 브랜드들을 상대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습니까
“세계적 기업들은 대량 생산 구조가 이미 갖춰졌습니다. 제조 물량이 많다 보니 원가가 저렴합니다. 이들과 경쟁하려면 가격이 최소한 비슷하거나 싸야 하는데, 생산량이 적은 신생 브랜드로서 쉽지 않았습니다. 론칭 초기 미얀마에 공장 6개를 과감히 인수한 것도 원가를 낮추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초기에 그런 투자를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몇 년간 적자가 많이 났죠. 연 매출 5000억원 규모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적자였습니다. 돈을 벌면 무조건 재투자하며 효율성을 올렸습니다.”
▶단기간에 탑텐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일본 불매운동’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영향이 없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2019년 ‘노(NO) 재팬’ 운동이 시작되면서 유니클로 매출이 반토막이 났으니까요. 하지만 이를 계기로 탑텐이 유니클로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건 탑텐이 그동안 열심히 해왔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다 보니 행운이 왔고, 그 기회를 잘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탑텐의 진정한 성공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국은 안방입니다. 어느 글로벌 브랜드보다 한국 고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취향이 어떤지 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랜 OEM 경험으로 제조 노하우도 풍부했습니다. 안정적인 임가공 시스템을 바탕으로 트렌드에 맞는 새로운 상품에 대한 시도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유니클로·자라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저기만 따라잡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달린 겁니다.”
▶한국이 좁다고 느끼진 않습니까.
“2년 전부터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해외에 나가는 시점은 3년 후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안방을 확실히 장악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업력이 훨씬 오랜 글로벌 SPA 브랜드의 제조·디자인 수준은 여전히 높고, 고정 팬층도 상당합니다. ‘탑텐의 제품이 훨씬 좋다’는 인식이 뿌리내려야만 한국에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해외로 가는 K패션 브랜드들이 많습니다.
“안방에서 성공하지 못한 브랜드가 해외에 나가서 잘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한국 시장부터 장악할 내공이 있어야 해외에서 경쟁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모두 팝송을 듣고 외화를 봤지만, 지금은 대부분 K팝을 듣고 K드라마를 봅니다. 안방 시장을 확실히 장악하니 그 힘이 뻗어나가 해외 시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겁니다.
▶K패션의 현주소를 어떻게 진단합니까.
“지금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벌고 의미 있는 성과를 낸 브랜드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K팝도 오랜 시간 내공을 쌓고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린 끝에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음악·영화 등 콘텐츠 산업이 그러하듯, 패션도 히스토리가 중요합니다. 장기적으로 봐야 합니다. K패션이 K팝처럼 성공하려면 역량이 더 쌓여서 새로운 디자이너들이 나와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합니다.”
양지윤 기자 y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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