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울릉도의 대변신<3> 작은 연변에서 빼먹었던 전복 맛
지난 6월12일 도동항 입구에 ‘오독이’ 상 제막식이 있었다. 울릉도를 상징하는 오징어와 독도를 합성하여 만든 조형물이다.
높이가 4미터 이상은 족히 될 것 같은 큰 조형물로 ‘I♥울릉도’와 황금빛 오징어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울릉도에 다녀간 흔적을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고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국 시도협회가 울릉군에 기부한 ‘오독이’ 상이 모든 이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으면 좋겠다. 울릉도 여기저기에서 덧셈을 하며 뭔가 하나씩 변화해 가는 느낌이다.
도동항은 어렸을 적 이곳저곳을 누비며 다니던 나의 나와바리(구역)였다. ‘작은연변’이 특히 그랬다. ‘오독이상’의 왼쪽 축대 위에 있는 호텔의 옛 2층 일본 집이 내가 살았던 곳이다. 1층 창고에는 신익희(申翼熙)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포스타가 잔뜩 쌓여있었던 걸로 보아 아버지가 민주당 선거사무소를 책임졌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인 1956년경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라곤 크고 작은 배들이 다니는 도동항이었다. 1960년대의 도동항 전경(울릉군), 원형 안의 2층집이 내가 살던 곳이다.
도동항은 왼쪽이 ‘작은연변’이고 오른쪽은 ‘큰연변’이라 불렀다. ‘작은연변’은 강고배라 불리던 작은 목선들이 주로 이용했고 ‘큰연변’은 비교적 큰 발동선이 정박하며 연락선이 들어오면 사람과 화물을 옮겨 실어 나르는 하시게(전마선傳馬船의 일본어)가 분주히 드나들던 곳이기도 하다.
이 두 축항 사이에 긴 축대가 바다까지 쭉 이어져 있어 저녁이면 바람 쏘이는 쉼터역할도 하던 곳이다. ‘큰연변’ 안에는 도동 시가지에서 통조림공장을 거쳐 많은 하수가 흘러내리던 대형 배수로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날씨가 더우면 수협창고 다리 밑 개천에 내려가 얼굴을 씻을 정도로 비교적 깨끗했던 기억이 난다.
‘작은연변’이라 불리던 이 포구가 내겐 꽤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등대(우린 늘 도다이라고 일본말로 불렀다)가 있었고 저녁이면 낚싯대를 들고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면서 임연수도 낚고 아이들과 장난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깜깜한 밤 등대 근처에서 플래시를 비치면 게들이 기어 올라와 버킷에 한가득 담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할 즈음 포구안쪽 바위틈에 큰 문어가 굼실굼실하는 것이 보였다. 어린 나로서는 내 스스로 이놈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 포구 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문어가 있다고 큰 소리로 몇 차례 알렸고 어른들이 얼른 다가와 잡았다.
그들은 내 덕에 문어를 잡았음에도 다리 한쪽도 떼어주지 않고 희희덕거리며 떠나버렸는데 그때의 상심이 꽤 깊었던가 지금도 괘씸한 생각이 든다. 지금 그들이 살아있다면 큰소리로 항의라도 하고 싶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건 공평한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사라진 등대지만 도동항하면 너무나 분했던 그때가 항상 떠오른다.
‘작은연변’에는 많은 괭이갈매기가 날아다니면서 물 위에 떠있는 오징어창자를 낚아채곤 했는데 하루는 작은 나무판자에 오징어내장을 낚시 바늘에 꿰어 냅다 던져놓았더니 갈매기가 걸려들었다.
한 번도 갈매기를 내 손에 잡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아마도 호기심의 발동이었을 것이다. 줄을 당겨 실체를 만져보고 이내 풀어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곳은 겨울이면 잠수선(潛水船, 우린 머구리선이라고 불렀다)이 잡아온 전복을 육지에 내다 팔기위해 둥근 대나무바구니에 담아 로프에 묶어 보관하던 곳이기도 했다. 로프에 묶여있는 수십 개의 대나무바구니가 물속에 잠긴 채 화물선이 올 때까지 얼마동안 물속에 잠긴 채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포구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축항 쪽으로 얼른 내려가 밧줄을 당겨 바구니 위에 얽어매어놓은 작은 그물망을 풀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전복들이 가득했다. 겁이 난 나는 한 개만 빼내고 그물망을 묶지도 않은 채 그냥 놓아버리고 얼른 집으로 도망쳐왔다.
출하 시에 전복 한 마리도 들어있지 않은 빈 바구니를 발견했을 주인을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주인은 홍성에 사는 고향후배인 전선희의 부친인 전일조씨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뒷골목 그의 집 앞에는 시커먼 해삼이 늘 가마니에 놓인 채 햇볕에 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잠수선 사업을 했을 것이고 전복도 같이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잡혀왔는지 확실히 모르겠으나 거북에게 막걸리를 먹이고 바다로 돌려보내던 모습도 생생하다. 포구를 벗어날 때까지 몇 차례나 목을 들어 올리며 많은 구경꾼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우린 이를 목숨을 살려준 감사의 뜻으로 해석했고 내심 오징어 풍어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지금 터미널이 있던 곳에는 공중화장실이 있었는데 바로 위의 넓적한 큰 바위가 어린 우리들의 큰바위 놀이터였다. 바위를 날듯이 타고 올라가면 ‘작은연변’ 포구 안쪽을 볼 수 있는데 많은 목선들이 뭍에 올려 져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곳은 거의 직벽으로 된 낭떠러지인데 빨갛게 익은 볼뚜(보리수나무 열매)를 따려고 조심스레 내려가다가 5~6미터는 족히 되었을 내리막에 미끄러져 보리수나무에 사타구니가 걸려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다.
나무에 걸린 것이 천운이었다. 잘 익은 볼뚜열매는 어디서나 아슬아슬한 절벽에 걸쳐있어 어린 우리들에게는 목숨을 건 선물이었던 셈이다.
친구 이용기의 도움으로 간신히 올라올 수 있었지만 지금도 아찔했던 그 순간이 잊혀 지지 않는다.
‘큰연변’은 1962년10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이 군함을 타고 도동항에 도착하다가 바닷물에 빠졌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사동항, 저동항, 현포항으로 여객선 선창이 많이 늘어났지만 예전에는 여객선이 입출항하는 유일한 항구가 이곳 도동항뿐이었다. 접안시설이 없어 하시게라고 불리던 전마선으로 노와 로프를 이용하여 사람과 화물을 싣고 내리던 때였다.
그랬던 ‘큰연변’은 이제 작고 아름다운 공원으로 변모하여 크고 작은 행사가 자주 열리는 곳이다. 전국노래자랑 울릉도편도 송해가 몇 차례 사회를 보며 촬영하던 곳이기도 하고 회당문화축제와 해변가요제도 자주 열리곤 한다. 여름 주말이면 색소폰 동호회원들이 관광객들을 위해 색소폰을 연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문어를 직접 삶고 자리돔을 쓸어 판매하던 가판대도 사라진지 오래고 좁은 주차장에 빼곡히 늘어서있던 노점상들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크고 멋지게 만든 ‘도동활어회센터’가 들어서있다.
지금의 도동항 여객선터미널은 낡은 터미널을 헐고 2013년 그 자리에 새롭게 들어섰다.
190억 원의 사업비로 3층(부지 7천34㎡, 연면적 1천478㎡)규모로 자연친화적인 예술 감각과 조형미를 갖춘 울릉관문교(길이 84.5m, 폭 4.5m), 대합실, 환송공원,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입출항시의 혼잡을 없애기 위해 승객전용 인도교를 설치하고 차량과 동선을 분리해 승객들은 고가 다리인 인도교를 통해 시내 진입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울릉도의 랜드마크가 된 관문교인데 이제 ‘오독이’ 조형물이 그 자리를 대신 이어받아 오가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을 것 같다. 도동항이 또 어떤 변신을 가져올 것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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