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휴지 2칸 남았다…화장실로부터의 사색

한겨레 2023. 11. 1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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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아침 스트레칭과 미온수로 몸을 순환시킨 뒤 우아한 스텝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경지에 이른 서예가의 붓질처럼 유려하게 일을 마치고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순간, 두루마리 휴지가 끝이 났다. 마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처럼.

우리는 시간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무심결에 마구 써버린다. 하지만 인생은 두루마리 휴지처럼 한정되어 있다. 이제는 앙상한 휴지심만 남아 있는 휴지걸이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언젠간 저 누우런 휴지심처럼, 생기는 사라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겠지.

두루마리 휴지는 인생 같다. 나누어진 칸은 시계 눈금 같으며,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결국 끝이 난다. 지구가 자전하듯 비슷한 일상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다 끝나는 인생처럼.

​ 어느덧 2023년도 11월, 가을이 막바지이다. 올 초 마음먹었던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 중인가? 대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또 삶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것만큼 반전 없이 지루한 영화처럼 느껴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올해를 두루마리 휴지로 치면 두칸 정도 남았을까? 한칸이라면 난감하겠지만 두칸이라면 어떻게든 비벼볼 만하다.

11월, 숫자 ‘1’이 두개다. 새로운 마음으로 두번째 출발을 해보면 어떨까? 1월의 숫자 ‘1’이 어묵 꼬챙이 같았다면, 11월의 ‘1’들은 젓가락 같아서, 다양한 반찬을 집어 먹듯 그동안의 경험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 11월, 새해 전 미리 새출발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제 곧 연말이 다가오고 여기저기서 ‘송년 모임’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연말모임에 너무 깊게 젖어버리면 일상으로 돌아와 작은 행복을 찾기까지 건조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이번 가을에는 좋아하는 술을 잠시 멈추고, 11월 초엔 일본어학원과 미디 작곡학원에 등록했다. 어느덧 금주 38일 차가 되었고, 술값을 배움과 성장을 위한 학원비로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아예 술을 끊은 것은 아니다. 나를 컨트롤할 수 있는지 가끔 테스트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도파민 넘치는 쾌락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넘쳐난다. 많은 것을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다. 술을 잠시 쉬었더니 새로운 감각들이 살아난다. 얼마 전 필라테스학원 선생님의 향수 냄새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처음으로 나를 위해 향수도 사보고, 일본어학원에 다니다 보니 노트 필기가 재미있어서 문구류에도 관심이 갔다. 내추럴 본 악필인 내가 난생처음으로 글씨 예쁘게 쓰는 법을 검색해 보고 있었다. 이미 다양한 취향의 커뮤니티와 전문가가 많이 있었다.

​11월, 화장실로부터의 사색이 새로운 시작과 성장으로 이어졌다. 우리도 언젠간 낙엽처럼 쓸쓸히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낙엽이라고 다 같은 낙엽이 아니다. 안타깝게 놓쳐버린 사랑의 슬픔을 간직하고 처연하게 떨어지는 낙엽도, 허무하게 존재의 의미도 모르는 채 맥없이 떨어지는 낙엽도, 낙하하는 동안 아름다웠던 삶의 잔향을 간직한 채 경쾌하게 작별을 고하며 바스락거리며 사라지는 낙엽도 있다.

​휴지를 아껴 쓰면 그만큼 기회는 많이 찾아온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해도, 우리는 휴지를 한칸 한칸 소중히 사용해야 한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과도하게 힘을 주어 사용하면 휴지는 찢어지고 우리는 난감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처럼 하루하루 일상을 너무 애쓰며 살려 하면 쓰라린 상처를 입고 씻기 힘든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 빠삐용은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독방에 갇힌 채 꿈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 보지만 재판관과 배심원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살인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다. 인생을 낭비한 죄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난 휴지를 허투루 쓰지 않았어. 한칸 한칸 고이 접어 꼭 필요한 만큼 적절한 힘을 주어 정성껏 사용했지. 후회 없는 용변이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삶을, 시간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마음을 깨끗하게 닦고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가야 한다.

정말 언젠간 끝이 난다. 설령 12월이 되고, 인생의 마지막 쓸모없는 휴지 한 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낙담하지 말자. 네모난 휴지 한 칸으로 하얀 종이학을 접어 보자. 쓸모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하잘것없는 빨간 벽돌 부스러기 같은 존재더라도, 자신을 곱게 가루로 빻는다면, 아름다운 물감으로 다시 태어나 붉은 꽃잎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흘러가는 시간 위에 향수를 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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