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비극..'겁에 질린'김종태에 스러진 김무준·전혜원 [김재동의 나무와 숲]

김재동 2023. 11. 12.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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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재동 객원기자]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1645년 청 순치(順治) 2년) 6월 27일 (무인)의 기사다.

조선의 왕 중 공식적으로 친자식을 죽인 왕은 중종과 영조다. 중종은 경빈 박씨의 소생으로 장남이자 서장자인 복성군 이미를 김안로의 무고를 받고 사사했다. 복성군은 이복 동생 인종에 의해 복권됐다.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잃은 7년 후 42세 고령에 얻은 아들 이선을 애지중지했으나 과도한 기대에 엇나간 그가 27세 되던 1762년 7월, 삼복더위 속 뒤주에 가둬 사사한다. 죽은 후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를 써 사도세자란 시호를 내린다. 임오화변이다.

이들 외에도 바로 인조가 아들 소현세자를 사사한 혐의를 받는다. 청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1645년 음력 2월 귀국후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갑자기 죽었다. 인조는 독살의 혐의가 짙은 소현세자의 장례를 서둘러 치렀고 그를 치료한 의관 이형익을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에도 불구하고 처벌치 않았다. 또한 친자식은 아니지만 며느리인 세자빈 강씨는 사사했다.

자식을 죽인 중종과 영조는 콤플렉스가 심했다. 중종은 이복 형인 연산군의 폭압정치에 늘상 전전긍긍했고 마침내 반정이 일어나 반정군이 보호차 중종에게 군사를 보냈을 때 연산군의 칼날이 자신을 향한 걸로 오인, 자결까지 생각했던 인물이다. 반정세력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중종은 조강지처를 내치고 반정세력이 추천하는 왕비와 후궁을 들여야 했다. 김안로 일파가 세자(나중 인종) 저주사건인 ‘작서의 변’을 연출해 복성군과 경빈 박씨를 음해했을 때도 세밀한 조사 없이 둘을 사사해버렸다.

영조는 2가지 콤플렉스를 평생 안고 살았다. 그 하나가 어머니인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다. 27명의 조선 왕 중 유일한 천민 소생이다. 다른 하나는 이복 형 경종 독살설이다. 와병 중인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진어한 것이 영조이고 이 탓에 경종이 붕어했다는 설은 급기야 재위 4년 이인좌의 난으로까지 이어져 재위기간 내 영조를 괴롭힌다.

인조는 어떤가? 같은 반정을 통해 재위에 올랐지만 중종은 성종의 아들인데 반해 인조는 선조의 손자일 뿐이다. 이 때문에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데도 신하들의 지난한 반대를 물리쳐야 했다. 재위 2년 차엔 이괄의 난을 맞아 공주까지 쫓겨갔는가 하면 욱일승천하는 후금의 기세를 얕보고 숭명배금만 고집하다 정묘호란때 오랑캐의 동생이 되었던데 이어 병자호란으로는 오랑캐의 신하가 돼 삼배구고두례를 치르는 수모를 겪었다.

광해를 내쫓고 임금은 되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어 자존감이 바닥을 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렇게 자존감이 낮아진 자리를 의심과 불신, 시기와 질투가 차지했고 보국안민하려는 아들 소현세자의 행태마저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

드라마 속에서 인조(김종태 분)는 병자호란 포로 환송에 앞장 선 세자(김무준 분)가 그 포로들을 반정의 전면에 내세울 것을 우려하는 피해망상환자로 그려진다. 소용 조씨(소유진 분)는 이 틈새를 노려 세자와 세자빈 강씨(전혜원 분)를 음해한다.

당시 인조는 강씨를 편드는 대신들에게 노골적으로 화를 내며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1646년) 2월 9일 (병술))라 막말을 하였고 급기야 재위 24년(1646년 3월 15일) 강빈 사사를 명하는 전교를 내린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 적의를 만들어 놓았고 내전의 칭호를 공공연히 참람하게 사용하였으며, 지난해 가을에는 분노하는 마음이 일자 인군의 처소와 아주 가까운 곳까지 와서 큰소리를 지르며 발악하였고,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를 폐한 지도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니, 이런 짓도 차마 하는데 어떤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이렇게 환히 드러난 악행을 가지고 그의 심술을 미루어 본다면 흉물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그 흉악함이 이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다. 군부를 해치고자 한 자를 천지 사이에 하루라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폐출한 다음 사사(賜死)하라.”(승정원일기)

인조는 강빈의 죽음 이후 자신의 손자이자 강빈의 세 아들 또한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1648년(인조 26년) 첫째 석철(경선군)은 장독으로 죽고, 둘째 석린(경완군)은 병으로 죽게 되며, 셋째 석견(경안군)만이 살아남아 효종 때에 귀양에서 벗어났다.

지난 17회에서 남연준(이학주 분)으로부터 내사옥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고신과 추국 사실을 보고받은 장철(문성근 분)은 말했었다. “나라의 임금이 잔인해졌으니 장차 이 나라에 큰 화변이 닥칠 것이다. 아느냐? 겁에 질린 자는 잔인해진다.”

그렇게 겁에 질린 아비는 자식과 며느리를 죽이고 철모르는 손자들까지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 제 피붙이까지 그렇게 몰아세우는 판에 스러지는 민초들의 목숨이야 말로 무엇할까.

유자의 나라 조선의 왕은 나라 안 제1의 선비고 제 1의 양반이다. 그 선비, 양반의 행태가 이 지경이다. 드라마의 주인공 이장현(남궁민 분)이 경멸하는 속성 그대로다. 남연준 등 유생들의 스승으로 우국충정을 가르치는 장철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는 이장현의 생물학적 아비임이 드러난 장철도 양반이란, 선비란, 허명에 휘둘려 종복 상도를 때려죽였었다. 어린 장현을 업고 다니던 상도는 휘파람을 잘 불어 장현이 ‘양음’이란 또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었다. 장철이 치도곤을 명한 이유는 아마도 그 종복 상도가 장현이 어린 시절 그렇게 의지하던 누나를 좋아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당시의 장철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애민을 입으로 떠들었지만 정작 신분이란 기득권이 훼손될까 겁에 질려 무자비해졌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드라마 ‘연인’ 속 등장하는 모든 양반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콤플렉스 덩어리들은 아녔을까? 백성을 하늘로 보지 못하고 기득권에 연연하는 제 속의 이율배반, 지켜내지 못한 속환 포로들의 원망이 두렵고, 지켜내지 못한 처자들을 환향녀라 손가락질하는 비열함이 그들의 콤플렉스는 아녔을까? 아비의 질투에 스러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죽음이 애처롭다.

/zaitung@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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