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한 걸음 물러나야 보이는 것이 있다! 김성철도 그랬다!

손동환 2023. 11. 1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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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10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9월 19일 오후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자신이 지닌 시야와 생각의 범위를 확장할 때, 포착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이유로, ‘한 걸음 물러나서 봐라’는 말이 존재한다. 원주 DB 코치였던 김성철도 마찬가지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것들을 보고 있다. 농구 코트 밖에서 한 걸음 물러나, 농구인으로서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SBS 첫 인상요?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웃음)”
김성철은 경희대 시절 강혁(현 대구 한국가스공사 감독직무대행)과 원투펀치를 이뤘다. 키와 피지컬이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운동 능력과 정교한 슈팅 능력,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근성 등을 지닌 포워드였다. 실속을 아는 선수이기도 했다.
그런 김성철이 1999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 등장했다. 전체 4순위로 안양 SBS(현 안양 정관장)에 입단했다. 조상현(현 창원 LG 감독)과 조우현, 황성인(현 단국대 코치)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1~3순위를 차지했기에, 4순위가 주는 의미는 김성철에게 컸다.
김성철은 데뷔 시즌부터 SBS에 없어서는 안될 선수였다. 1999~2000 정규리그 전 경기(45경기)에 출전했고, 경기당 27분 56초 동안 12.7점 3.1리바운드(공격 1.1) 1.7어시스트 1.1스틸에 경기당 1.3개의 3점슛을 퍼부었다. 3점슛 성공률 또한 37.2%로 높았다. SBS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김성철은 “SBS의 첫 인상은 좋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1999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4순위로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외국 선수 2명이 함께 뛰던 시기였습니다. 또, 그때는 조니 맥도웰과 아티머스 맥클래리 등 덩치 좋은 4~5번이 외국 선수 조합으로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구단이 가드와 슈터를 선호했습니다. 조상현 감독이 1순위인 건 확정이었고, 조우현과 황성인, 제가 2순위 후보였죠.
하지만 저는 조우현 같은 슈터가 아니었습니다. 황성인 같은 포인트가드는 더더욱 아니었죠. 그때만 해도, 센터에서 포워드로 포지션을 바꾸는 중이었습니다. 김영만 선배님(현 부산 MBC 해설위원)과 전희철 선배님(현 서울 SK 감독), 추승균 선배님(현 SPOTV 해설위원) 같은 유형의 장신 포워드였죠.
제가 비록 가드나 슈터는 아니었지만, 저는 2~3번째로 뽑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4순위가 됐어요. 또, 당시 SBS 분위기가 좋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 포지션에 정재근 선배님(전 연세대 감독)도 계셨죠. 게다가 단상에 올라갈 때, 감독님께서 대릴 프루 선수의 유니폼을 저에게 입혀주셨어요. 유니폼이 너무 커서, 무릎까지 내려오더라고요.(웃음) 어렸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더 안 좋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입단 팀이 SBS였습니다. 첫 인상은 어떠셨나요?
SBS는 저에게 너무 고마운 팀입니다. 저 역시 ‘SBS 맨’이었다는 자부심을 가졌죠.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SBS의 첫 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웃음) 뭔가 어둡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렇지만 데뷔 시즌부터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김상식 선배님(현 안양 정관장 감독)과 정재근 선배님이 팀의 원투펀치였고, 저는 1~3라운드까지 식스맨으로 뛰었습니다. 그러나 외국 선수 문제가 발생했고, 팀 성적도 가라앉았어요.
그러다가 김인건 감독님(전 태릉선수촌장)께서 변화를 주셨습니다. 리빌딩을 선언하신 거죠. 그래서 에너지 레벨을 상승시킬 라인업을 구축하셨습니다. 제가 그 라인업의 일원이 됐죠. 그러면서 제 경기력이 올라간 것 같아요.

첫 번째 터닝 포인트
김성철은 데뷔 시즌부터 2005~2006시즌까지 시즌 평균 두 자리 득점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김성철의 득점력은 꾸준했다. 또, 3점을 메인 옵션으로 삼았음에도, 김성철의 득점력은 안정적이었다.(1999~2000 : 12.7점, 2000~2001 : 14.4점, 2001~2002 : 12.2점, 2004~2005 : 10.9점, 2005~2006 : 10.9점)
안양 KT&G(SBS가 2004~2005시즌 종료 후 KT&G로 매각됐다, 현재 팀명은 안양 정관장)의 외곽 공격을 책임진 김성철은 2006년 5월 FA(자유계약)를 맞았다. 그러나 원 소속 구단인 KT&G와 계약을 맺지 못했다. 2006~2007시즌 보수 총액 3억 원을 제시한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로 소속을 옮겼다.
전자랜드에서의 첫 시즌은 나쁘지 않았다. 2006~2007 정규리그 37경기 평균 31분 30초 동안 11.6점을 넣었고, 경기당 1.7개의 3점슛에 41.3%의 3점슛 성공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2007~2008시즌부터 세 시즌 동안 평균 한 자리 득점으로 부진했다. 그 부진이 2009~2010시즌까지 이어졌다.

2006년 5월. FA가 되셨습니다. 행선지는 전자랜드였는데요.
SBS가 2004~2005시즌 종료 후 KT&G로 매각됐습니다. KT&G는 당시 전력 보강에 힘을 쏟았습니다. 주희정 고려대 감독을 영입한 것도 그런 이유였죠. 우승을 위해 열정을 보여줬습니다.
다만, 프로 구단 운영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KT&G 첫 FA가 저였어요. 하지만 KT&G는 FA(자유계약)에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KT&G가 FA 자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저 역시 ‘KT&G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서운함이 컸어요.
때마침 여러 구단에서 영입을 제의했습니다. 전자랜드가 가장 적극적이었어요. 제가 2005~2006시즌 중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전자랜드는 FA 기간 동안 저에게 관심을 보여줬습니다. 저 또한 전자랜드의 관심을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이유로, 전자랜드 유니폼을 입게 됐죠.
FA 선언 후 첫 시즌에는 득점력을 유지했습니다.
사실 2006년 비시즌은 정말 바빴습니다. 도하 아시안게임에 나서야 했고, 르브론 제임스-크리스 폴 등이 포함된 미국 남자농구 국가대표팀과 이벤트 경기도 치렀어요. 결혼도 했고요. 몸을 가다듬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새로 부임하신 최희암 감독님께서 저를 살려주려고 하셨습니다. 에이스 혹은 슈터의 득점력을 올리는 농구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거든요. 감독님의 믿음 덕분에, 제가 팀의 간판으로서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팀은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 점이 아쉬웠어요.
하지만 2007~2008시즌부터 3시즌 연속 평균 한 자리 득점에 머물렀는데요.
황성인과 조우현, 저와 이홍수 등 동기들이 많았습니다. 32~33살 정도 된 고참들이었죠. 하지만 최희암 감독님께서 전자랜드를 젊은 팀으로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제 역할이 많이 줄었고, 제 비중도 줄었습니다. 부상 여파도 있었고요.
그러나 돌아보면, 선수는 어느 상황에서든 자기 경기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임무를 받아도, 자기 목표를 설정해야 하고요.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들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자존심만 내세웠거든요. 그게 너무 후회돼요.

반지, 그리고
김성철은 슬럼프에서 한동안 탈출하지 못했다.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한 김성철은 결국 트레이드 대상자가 됐다. 전자랜드가 KT&G로부터 이현호를 받았고, KT&G가 이현호 대신 김성철을 받은 것. 트레이드 한 번으로 인해, 김성철은 친정 팀으로 돌아왔다.
김성철의 입지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위치에 맞는 역할은 그렇지 않았다. 고참으로서 선수들을 하나로 묶었고, 안양만의 팀 컬러를 확립했다. 그리고 2011~2012시즌. 김성철은 안양 KGC인삼공사(현 안양 정관장 레드 부스터즈)에 처음으로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데뷔 13년 만에 우승 반지를 거머쥐었다.

전자랜드와 KT&G가 2009~2010시즌 도중 트레이드를 단행했습니다. 처음으로 트레이드를 겪으셨는데요.
FA는 저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거지만, 트레이드는 다릅니다. 또, ‘내가 가야 하는 팀은 나를 원하지만, 내가 원래 있던 팀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컸죠.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팀을 더 생각했습니다. 나를 원하는 팀한테 보답하는 게 더 중요했어요. ‘더 잘해야 한다’고 결의했고요. 그게 더 좋은 집중력으로 연결된 것 같아요.
약 4년 만에 안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변화가 느껴졌나요?
제가 SBS에 입단했을 때, 이상범 감독님(전 원주 DB 감독, 현 일본 고베 스토크스 코치)께서 주장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안양으로 돌아오니, 이상범 감독님께서 사령탑을 맡고 계셨습니다. 팀의 최고참인 저에게 “후배들을 잘 이끌어달라”고 주문하셨죠. 저 역시 최고참으로서 책임감을 느꼈고, 리더 역할을 하려고 했습니다. 후배들에게 싫은 소리도 많이 했고요.
2011~2012시즌 처음으로 우승을 경험했습니다. 데뷔 13년 만에 거둔 성과였는데요.
우승은 저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2011~2012시즌 때 기회를 얻었어요. 양희종(전 안양 정관장)과 김태술(현 SPOTV 해설위원), 이정현(현 서울 삼성)과 박찬희(현 원주 DB), 오세근(현 서울 SK) 등 멤버가 좋았고, 저희가 정규리그 2위를 했거든요.
그런데 선수들이 2위를 한 후 뭔가 풀린 것 같았습니다. 또, ‘어차피 동부(현 원주 DB)한테는 안 돼’라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2004~2005시즌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어떤 이야기였나요?
그때 단테 존스가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팀 전력도 너무 좋았어요. 하지만 저희는 정규리그 연승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어요. 만족감도 컸고요. 플레이오프에서 KCC를 이길 수 있었음에도, 이기지 못한 이유였죠.
그게 너무 후회됐습니다. 그래서 선수들한테 “우승의 기회는 아무 때나 오지 않는다.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할 때, 후회하는 마음이 클 거다”고 했어요. 제가 했던 말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선수들이 플레이오프와 챔피언 결정전에서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의 우승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두 번째 터닝 포인트
앞서 이야기했듯,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만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성철도 그랬다. 2012~2013시즌 종료 후 선수 유니폼을 벗었다.
김성철은 은퇴 직후 친정 팀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6월. 모교인 경희대 코치를 맡았다. 모교 후배들과 땀을 흘린 후, NBA D리그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2017년에는 KGC인삼공사 시절 스승이었던 이상범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2022~2023시즌 중반까지 원주 DB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D리그 코치부터 수석 코치까지 다양한 경험을 했다.

2012~2013시즌 종료 후 은퇴했습니다.
이상범 감독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셨습니다. 특히, 후배들을 이끄는 걸 좋게 봐주셨죠. 그래서 “코치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선수 시절 중간에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방법도 조언해주셨고요.
그리고 저희 팀이 젊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허리가 좋지 않았어요. 고민 끝에 선수 생활을 마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돌아보면, 적절한 시점에 은퇴했다고 생각해요.
KGC인삼공사와 경희대, DB 등 다양한 무대에서 오랜 시간 지도자 생활을 했습니다.
최근 들어 느낀 게 있습니다. 제가 배웠던 것들만 내세우면 안 된다고요.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고, 사람들의 생각도 세대별로 확 달라졌거든요. 다시 말씀드리면, 시대와 사람의 변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농구에서 중요한 건 전술과 기술입니다. 그렇지만 시대와 사람의 변화를 경험하다 보니, 선수와의 소통도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선수들이 스스로 느끼게끔 하는 소통 방식이 지도자에게 중요할 것 같아요.
농구도 많이 달라졌잖아요.
맞습니다. 특히, 스테판 커리(NBA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나타나기 전후로, 농구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스테판 커리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3점으로는 챔피언에 오를 수 없다”였다면, 지금은 “3점을 쏘지 못하는 빅맨은 한계를 안고 있다”로 바뀌었습니다..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런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DB 코치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지금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 있습니다.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어요. 그리고 주변에 있는 대학농구 팀이 훈련을 시작하는 시기라, 훈련을 참관하려고 합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농구 월드컵 전 경기를 봤습니다. 일본이 인상적이더라고요. 특히, 카와무라 유키(일본 B리그 요코하마 B-코세어즈)와 와타나베 유타(NBA 브루클린 네츠), 바바 유다이(일본 B리그 아루바루쿠 도쿄)와 조쉬 호킨슨(일본 B리그 선로커즈 시부야) 등이 그랬습니다. 그 선수들 모두 공통점을 갖고 있더라고요.
어떤 공통점이었나요?
모두 해외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선수들을 상대할 때,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자신보다 피지컬 좋은 선수들을 상대하는 노하우도 있고요.
“다 잘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김성철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농구 인생을 돌아봐달라”고 말이다.
김성철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김성철의 생각에는 회한도 담겨있었다. 선수로서의 방향을 정확히 설정하지 못했다는 회한이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레전드나 슈퍼스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농구인으로서, 농구로 받은 혜택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농구의 발전 토대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김성철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선수를 다시 한다면, 조금 더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제 실력에 안주했던 시기가 길었거든요. 그리고 ‘공격적이고 과감한 플레이를 배웠다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코치 시절에 “이것저것 해봐라”고 선수들한테 이야기했죠.
또, 저는 ‘쟤는 이것만 잘하고, 저건 못해’라는 소리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올 어라운더 플레이어를 꿈꿨어요. 그러다 보니, 못하는 것에도 시간을 많이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어느 팀에서도 꾸준한 퍼포먼스를 내려면, 확실한 장기가 있어야 하더라고요.
그런 생각들이 있었기에, 선수들한테 “찬스 나면 던져. 복잡하게 할 필요 없어. 그리고 누군가가 너를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야 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식스맨들을 많이 가르치는 입장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게 도움이 됐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았고요.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본문 첫 번째 사진)
사진 = KBL 제공(본문 2~5번째 사진), 본인 제공(본문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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