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던 한일전… 균형이 무너졌다

유대근 2023. 11. 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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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스포츠 한일전 성적 2015년 이후 급락 
女 농구, 최근 9년간 '전패'... 男 배구도 밀려 
'미래 가늠자' 연령별 대표팀도 한일전서 열세
동·하계올림픽과 아시안게임, 日에 이미 추월
우리 국민 73.8% "日엔 이겨야" 열망 여전해 
"저출생 시대, '특공대' 전략 대신 저변 늘려야"
편집자주
한국 스포츠, 어떻게 기억하나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크게 도약한 우리 스포츠는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를 줬습니다. 하지만 저력의 K스포츠가 위기에 섰습니다. 프로 리그가 있는 종목조차 선수가 없어 존망을 걱정합니다. 반면, 라이벌 일본은 호성적을 거두며 멀찍이 달아났습니다. 희비가 엇갈린 양국 스포츠 현실을 취재해 재도약의 해법을 찾아봤습니다.
2012년 9월 열린 런던올림픽 당시 우리 여자 배구대표팀의 양효진이 준결승전에서 일본에 패한 뒤 눈물을 닦으며 코트를 떠나고 있다. 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모든 팀에 다 이겨도 일본에 지면 전패이고, 다른 나라에 다 져도 일본에 이기면 전승이다.

김응용 전 야구국가대표팀 감독

노(老)감독의 말처럼 한일전 승패는 단순히 한 경기를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스타디움과 그라운드, 코트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과거사에서 비롯한 국민감정이 선수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돼 승부욕을 끌어올린다. 특히, 경제∙문화 등 대부분의 영역에서 일본에 크게 밀렸던 과거에는 '스포츠만이라도 이겨야 한다'는 열망이 강했다.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는 한일전. 감독이 선수들에게 정신무장을 요구할 필요도 없었다. 일본에 크게 밀리던 종목에서 우리가 종종 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서 나왔다.

하지만 최근 한일전 양상이 달라졌다.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면서 산업∙문화 등 다수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거나 뛰어넘었지만 스포츠만 반대로 움직였다. 우리가 한 수 위라고 여겼던 종목에서도 일본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는 일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40년 이상 유지돼온 한국식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이 유효 기간을 다한 탓"이라고 지적한다.


일본 얕봤던 남자 배구, 2015년 이후엔 '6승 8패'로 열세

한국일보가 12일 국내 프로리그가 있는 4대 스포츠(농구∙배구∙야구∙축구)의 성인 국가대표팀 한일전 전적을 분석한 결과, 2015년 이후 승부의 균형추가 일본 쪽으로 크게 기울었음이 확인됐다.

특히 배구와 농구의 부진이 두드러졌다. 2010년대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한 수 위라고 자부하던 종목들이다. 여자 농구 대표팀은 서울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1986년부터 2014년까지 한일전에서 31승 14패(승률 68.9%)로 크게 앞섰다. 하지만 2015년 이후에는 5번 붙어 모두 졌다. 지난 달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4강전에서 일본에 23점차(58 대 81) 대패한 게 마지막 대진이었다. 당시 대표팀 주장 김단비(33·우리은행)는 "나는 일본을 이길 때도 뛰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역전을 당한 선수"라며 자책하기도 했다.

남자 배구도 1986년부터 2014년까지 일본과의 대결에서 3번 중 2번꼴(53승 30패∙63.9%)로 승리했다. 반면, 2015년 이후에는 오히려 6승 8패(42.9%)로 밀리고 있다. 야구는 1986년부터 29년간 한일전 승률이 33.3%(20승 40패)였고, 2015년 이후에도 4승 8패로 똑같은 승률을 보였다. 그러나 임팩트는 달랐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선 일본 최고 스타였던 스즈키 이치로가 이끌던 일본을 두 번이나 잡아냈지만, 2015년 이후 승리한 경기는 우리는 정예 멤버를, 일본은 사회인 선수를 출전시킨 사례가 많았다. 양국의 프로 선수끼리 전력으로 맞붙은 2023 WBC에선 4 대 13으로 참패했다.

2021년 3월 일본 요코하마 닛산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일 축구 국가대표 친선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이 0-3 패한 뒤 아쉬워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미래도 어둡다. U-16(16세 이하) 등 여자 농구 연령별 대표팀들은 2015년 이후 일본과 7번 맞붙어 6번 졌다. 남자 배구(2승 3패·승률 40.0%)와 여자 배구(1승 3패·25.0%), 여자 축구(5승 2무 23패·17.9%)도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본은 올림픽·아시안 게임 등 주요 국제대회 종합 성적에서도 우리를 추월한 뒤 격차를 벌리고 있다. 하계 올림픽에선 우리의 메달 순위(금메달 수 기준)가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7번의 대회 중 6번이나 일본보다 높았다. 하지만,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일본에 추월당했고, 2020 도쿄 올림픽에선 일본이 안방의 이점을 활용해 종합 3위를 기록한 반면 우리는 16위에 그쳤다.

동계 올림픽에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부터 2018 평창 대회까지 5개 대회 연속으로 종합 순위에서 일본을 눌렀지만, 2022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역전(한국 14위, 일본 12위)당했다. 아시안게임에선 최근 2개 대회 연속 일본에 종합 2위를 내주고 3위로 내려앉았다. 특히, 올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목표 순위를 3위로 정하고 대회에 임했다. 붙어 보기도 전에 전력상 일본에 밀린다는 걸 자인한 셈이다.


"日에 밀린 지 오래돼...김연경 효과 등으로 착시"

현장에서 오래 활동한 스포츠인들은 한일전 열세가 놀랍지 않다는 반응이다. "대부분 종목에서 전력상 일본에 밀린 건 이미 오래된 일"이라는 것이다. 다만, 종목별로 슈퍼스타가 등장해 마치 대등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란 얘기다. 자 배구 연령별 대표팀 감독을 지냈던 A씨는 “연령별 대표팀은 2014년부터 태국과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에도 지기 시작했다”면서 “성인 대표팀에는 김연경(35∙흥국생명)이라는 거목이 있어 (마치 우리 전력이 강한 것처럼) 착시 현상을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2021년 8월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0-3으로 패한 한국 김연경이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아시아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건 이제 일본만이 아니다. 베트남 등 인구 대국들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가사하라 겐지 일본 올림픽위원회 강화부장은 지난달 18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인도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일본과 한국 모두 경계해야 할 수준"이라고 말했다. 인도 인구는 14억2,800만 명으로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됐다.

한국 스포츠의 성적이 신통치 않아도 우리 일상에 타격을 주지는 않는다. 1980년대 이전처럼 다른 분야에서 체감하는 콤플렉스를 스포츠에서 만회하고, 국력을 뽐내야 할 상황도 아니다.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만큼은 이겨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이 강하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한국일보가 여론조사업체 오피니언라이브에 의뢰해 지난달 20~26일 전국 만 18~65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웹조사한 결과 '일본과의 경기에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의견에 73.8%가 동의했다. 성적보다는 선수들이 즐기는 모습에 더 감동받는 쪽으로 국민 정서가 변하고 있지만, 한일전은 여전히 승패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셈이다.


"천재 나오기만 기다리는 구조로는 힘들어"

전문가들은 스포츠 전략의 궤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①운동 재능을 보이는 소수의 선수를 초등학교 때부터 선발해 ②학교 운동부라는 '병참 기지'에서 특공대 키우듯 훈련시키고 ③금메달만 따면 병역과 연금 등 온갖 혜택을 주는 시스템에 메스(수술용 칼)를 대야 한다는 것이다.

한일 스포츠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오시마 히로시(62) 작가는 "메달리스트에게만 특혜를 주는 한국 스포츠 시스템은 남북 간 체제 대결이 한창이던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이 사상 첫 금메달을 따자 자극받아 만든 것"이라면서 "강력한 당근책으로 소수 엘리트를 독려해 성적을 내기에는 인구 구조 등 시대 상황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2013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싱글에서 1위와 3위를 차지한 김연아와 일본이 아사다 마오. 온타리오=연합뉴스

결국, 천재급 선수에 의존해 당장 성적만 내려는 전략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엘리트 스포츠를 떠받치는 하부 구조(유소년 저변)를 탄탄히 다질 필요가 있다. 가위바위보도 운이 따르면 처음엔 몇 판을 더 이길 수 있지만, 승부가 거듭될수록 기대 승률(33.3%)에 수렴한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비인기 종목에 대한 투자와 관심을 지속하다 보면 재능 있는 세대가 등장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한국은 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사과(천재)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형국이라, 시간이 갈수록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일본을 이기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탄탄한 저변을 바탕으로 도약하는 일본 스포츠의 저력을 취재해 위기에 빠진 한국 스포츠가 가야 할 길을 찾아보는 'K스포츠의 추락, J스포츠의 비상' 시리즈를 오는 13일부터 보도합니다.

※<제보받습니다> 학교 체육이나 성인 엘리트 체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부조리(지도자의 뒷돈 요구, 대학·성인팀 진학·진출 시 부당한 요구 및 압력 행사, 운동부 내 구타 등 가혹행위, 학업을 가로막는 관행이나 분위기, 스포츠 예산의 방만한 집행, 체육시설의 미개방 등)를 찾아 집중 보도할 예정입니다. 직접 경험했거나 사례를 직·간접적으로 목격했다면 제보(dynamic@hankookilbo.com) 부탁드립니다. 제보한 내용은 철저히 익명과 비밀에 부쳐집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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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세상에서 가장 슬픈 데뷔··· 십자인대 끊어진 열일곱 은성, 농구 코트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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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학원 뺑뺑이 대신 팀플레이 4시간…'부카츠' 학생에겐 '중2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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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김연경에 가려졌던 한국 배구 민낯 "10년 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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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졸업하고 프로 구단서 6년 버틴 야구 선수 7.8% 불과…'바늘구멍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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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477억 들인 ‘호화 체육공원’… 조명탑 없어 '반쪽'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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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④ 일본 스포츠 '퀀텀점프' 비결
    1. • 노벨상 수상 이어지듯…일본 스포츠 도약 비결은 '백년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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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한국 도저히 이길 수 없다"던 일본… 선택과 과학으로 '퀀텀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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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최윤 선수단장 “스포츠 엘리트는 키우는 게 아니라 발굴… 1인 1기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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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⑤ 금메달 조바심 잠시 내려놔야
    1. • 국민 60% “메달보다 과정 중요”… 성적 지상주의와 결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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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11600550001482)
    3. • '붕괴 직전' K스포츠, "극약 처방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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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1m 앞에서 슛 날리고 강스파이크까지" 과학적 훈련법 설 자리 없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11611170001794)

 

도쿄=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이오늘 인턴 기자 oneul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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