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80년대 이후 강남 개발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크게 올림픽대로와 지하철 2호선의 완공, 삼성동 무역센터 단지의 조성, 테헤란로 등 격자형 간선도로망의 구축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중에서 올림픽대로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강변북로와 함께 연재 주제로 다뤄 보겠습니다. 휑하던 영동지구에 지하철역이 생기고, 대로가 뚫리며 빽빽한 고층 건물로 번화하게 되기까지 과정을 차근차근 짚어 보겠습니다.
3핵 도심을 순환하는 지하철 2호선
서울 지하철 역 중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역은 어디일까요. 일일 승하차 승객 합산 360만 명을 기록한 지하철 2‧8호선 잠실역입니다. 10위까지의 순위를 보면, 7개 역이 2호선에 속한 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잠실, 강남, 홍대입구, 신림, 선릉, 사당, 구로디지털단지 / 2022년 2월 기준). 주요 업무지구와 상업지구, 대학가를 두루 거치며 중심부를 한 바퀴 순환하는 2호선은 서울의 핵심 지하철 노선입니다. 그리고 이 황금 노선이 영동지구를 관통하게 되면서 강남 일대는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지하철 2호선 건설이 고개를 내민 것은 1호선을 착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71년도였습니다. 최초의 2호선 계획은 왕십리에서 을지로와 마포를 거쳐 여의도와 목동, 김포공항에 닿는 총길이 35.5km의 노선이었습니다. 을지로를 지난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지금의 노선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1974년 구자춘 서울시장이 취임하며 서울시 시정운영계획에는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앞선 여의도, 강남 개발사에서 이야기했듯 구자춘 서울시장은 서울이 단핵 도시를 탈피해 ‘3핵 도시’로 나아가야 함을 주창합니다. 사대문 안으로 집중된 도시 기능을 영등포와 영동으로 과감하게 분산해 서울이 세 개의 핵(도심)을 중심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구 시장이 보기에 기존의 2~5호선 지하철 계획안은 그의 3핵 도시를 실현하기에는 전혀 효율적이지 못한 구성이었습니다. 다섯 개의 노선계획이 사대문, 영등포, 영동 도심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지 못한 채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전임 양택식 시장 당시 계획된 지하철 노선을 전면적으로 뒤집어 새 판을 짜기 시작합니다.
구 시장은 직접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북 인구의 효율적인 분산, 그리고 구시가지 과밀방지를 위한 3핵 도심’을 설명하며 2호선 변경의 재가를 받아냅니다. 포병 장교 출신이었던 그는 독도법에 능해 지도에 직접 자를 대고 지하철 노선을 새로 그렸는데, 지도 위 선의 모양 거의 그대로 지하철이 지어졌다는 일화는 아직도 유명합니다.
3핵 도심 철학이 녹은 지하철 2호선은 사대문과 영등포, 영동을 모두 연계할 수 있는 노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 구로공단과 서울대 등을 거치고 잠실 택지지구를 지나는 역들을 끼워 넣어 49.2km의 원형의 순환선이 완성되었습니다. 지하철 2호선은 전형적인 도시 지하철계획의 순서를 뒤집은 설계였습니다.
지하철을 만들 때에는 도심과 시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 외곽을 잇는 방사형 노선을 여럿 만들고, 이 노선들이 포화 상태에 이를 때 쯤 부도심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순환선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서울은 지하철 1호선 하나 있는 상태에서 순환선인 2호선이 만들어졌고, 때문에 이를 보조할 방사형 간선인 3호선과 4호선의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지하철 2호선은 지선까지 합친 길이(60.2km)로 세계 최장의 순환선이라는 기록을 아직까지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1978년 2호선이 착공에 들어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서울시는 60km의 지하철을 뚫을 예산은커녕 총길이 10km도 되지 않는 지하철 1호선의 부채도 채 갚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말이 시대상처럼 통용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시는 지하철 공채를 발행해 3,400억 원의 건설비를 마련합니다.
지하철 2호선 착공 전해인 1977년 말 서울시 인구는 강북 489만 명, 강남 263만 명으로 총 772만여 명이었습니다. 지하철 2호선이 완전 개통된 1985년에 이르러서는 총인구 964만 명 중 강북 522만 명, 강남 442만 명으로 강남 인구가 강북 인구보다 큰 폭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년 후인 1999년에는 강남북의 인구 비율이 동률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 지하철 2호선의 개통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강북의 과밀 해소와 강남의 발전을 가속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봉은사 소유 논밭이 무역센터 단지로 탈바꿈하기까지
다시 시계태엽을 1970년으로 돌려 봅니다. 국가 차원에서의 영동지구 부동산 투기는 지난 화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당시 상공부(현 기재부) 장관이었던 이낙선은 김현옥 서울시장에게 상공부와 산하기관들이 들어갈 수 있는 대규모 종합청사를 지을 곳을 영동지구 내에 마련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영동지구에 종합청사가 들어온다면 지대상승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니, 청와대로부터 ‘투기 대행’ 임무를 맡았던 서울시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습니다.
종합청사 건설을 위해서는 대략 10만여 평의 부지가 필요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땅이 아니라 10만 평의 단일 부지를 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 서울시가 접촉한 곳이 봉은사였습니다. 봉은사는 천년고찰이었던 만큼 사찰 소유 재산이 적지 않았고, 절 바로 앞에 십만여 평의 드넓은 전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울시는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이 땅을 4억 3000만 원에 매입합니다. 이는 조계종 입장에서도 필요한 일이었는데, 전답을 매각한 자금으로 정부로부터 장충동 중앙공무원교육원 부지를 매입해 동국대학교 캠퍼스를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전답이 후에 서울의 핵심 요지가 될 줄은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종합청사는 착공 직전까지 갔지만, 후에 정부청사는 서울을 벗어나야 한다는 방침 때문에 영동지구 내에 들어오는 것이 무산되었습니다. 대신 한전 등 상공부와 연관이 있는 산하기관이 들어서게 됩니다. 1979년에는 이곳에 한국 수출상품 전시와 국제 박람회 개최 목적으로 한국종합전시관(KOEX, COEX의 구칭)이 건설되었습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며 삼성동 일대는 큰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한국종합전시관이 올림픽으로 밀려드는 인파를 수용하기는 어림도 없다는 판단에 지은 지 8년밖에 되지 않은 건물을 밀어버리고 새 전시장을 건설합니다. 새로 지은 전시장 옆에는 지상 55층의 한국종합무역센터가 건설되었는데, 높이 228미터의 55층 건물은 당시로서는 63빌딩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인터콘티넨탈호텔과 현대백화점도 올림픽 개막에 맞춰 문을 열었습니다.
리어카가 다니던 강남의 간선도로
영동지구를 개발하며 서울시는 한남대교와 영동대교 사이를 몇 개의 슈퍼블록으로 구획해 폭 넓은 간선도로망을 건설했습니다. 이때 영동대로와 강남대로, 테헤란로, 도산대로, 언주로, 사평로 등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 도로망이 갖춰졌습니다.
앞서 말한 대부분의 간선도로들이 지금은 ‘상습 정체구간’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제대로 된 건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폭이 50m에 이르는 대로들이 등장했을 땐 그야말로 개미 한 마리조차 다니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오죽 차가 없었으면 양 끝의 두 개 차선을 막아 ‘리어카 전용차선’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강남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간선도로 중 하나에는 ‘테헤란’이라는 다소 이국적인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 길 옆에는 조선왕조 성종과 정현왕후, 중종의 능인 선릉과 정릉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세 개의 봉분이 늘어서 있다 해서 이곳을 ‘삼릉공원’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에 착안해 1972년 이 길을 내며 ‘삼릉로’라 이름 지었습니다.
삼릉로가 테헤란로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은 1977년입니다. 그해 6월 골람레자 닉페이 테헤란 시장이 서울시와 자매결연을 위해 방한해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우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상대국 수도에 각각 테헤란로와 서울로를 만들자”는 제안을 합니다.
중동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1차 오일쇼크를 겪은 뒤였기 때문에 안정적인 석유 공급처가 필요했던 데다, 중동 건설 특수 붐이 일던 시기였습니다. 사우디와 더불어 중동의 맹주였던 이란은 ‘특별 관리’ 대상이었고, 더불어 그의 제안은 이란과의 친선을 다지는 데 더할 나위 없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를 테헤란로 일대는 중심상업 및 업무지역으로 지정되며 본격적인 개발에 돌입합니다. 90년대 경제 호황기에 길을 따라 수많은 오피스 건물들이 들어섰고, 이곳에는 소프트웨어 업체들과 정보통신 관련 기관, 벤처기업들이 입주했습니다. 테헤란로는 ‘테헤란밸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벤처 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ㅇ「강남 40년 영동에서 강남으로」, 서울역사박물관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 한울출판사
ㅇ 한종수·계용준·강희용, 「강남의 탄생」, 미지북스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