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냐, 종교냐…국체 놓고 나뉘는 이스라엘 청년들 [임명묵의 MZ학 개론]

임명묵 작가 2023. 11. 12.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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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나라보다 자유로운 텔아비브 청년들과 그 어느 나라보다 보수적인 예루살렘 청년들이 공존하는 국가

(시사저널=임명묵 작가)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은 10월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개시되기 바로 며칠 전에 "중동이 이렇게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구설에 오르기 딱 좋은 말이었다. 물론 설리번에게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이란은 억제되고 있었고, 어쨌든 중국의 중재하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표면상으로는 화해를 해냈다. 집권 초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틀어졌던 사우디아라비아도 미국과 계속 척을 질 수는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구체화된 새로운 중동 구상을 더 확대하고자 했다. 그간 팔레스타인 문제를 두고 서로 대화도 하지 않던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을 화해시켜 지정학적으로 안정적인 구도를 창출하고자 했다. 마침내 사우디아라비아도 조건부로 이스라엘과의 수교 가능성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미국 외교가의 난제이던 중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철저한 오판이었다.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수교가 성사되었을 때 고립무원이 될 것이 뻔했던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정치적 생존을 위해 대대적인 군사 행동을 감행했다. 아랍권은 물론이고 전체 이슬람 세계 여론이 흔들리면서 역내 불안정이 크게 올라갔다.

사실 문제는 팔레스타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을 계기로 지역의 외교를 능수능란하게 조정하는 이스라엘 내부도 상황이 여의치는 않았다.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이 사법부에 관한 행정부 개입 여지를 확대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스라엘 정국을 흔들고 있었다. 이번 하마스의 공격 성공도 이스라엘 정국 혼란을 노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렇다면 네타냐후 정권과 이스라엘 위기의 기원은 무엇이었을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유대교 율법을 엄격히 따르는 '하레디' 청년들 ⓒEPA 연합

세속주의자와 유대주의자로 나뉘어

이를 알기 위해서라면 먼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의 국가 이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이념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유대인들의 국가를 외치는 시온주의다. 하지만 이 시온주의는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초기 시온주의는 유럽의 세속적 민족주의에 대응해 생긴 것이었고, 다비드 벤구리온을 위시한 이스라엘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시온주의를 세속주의적인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로 간주했다. 게다가 이들은 강력한 사회주의 성향도 갖고 있었다. 공동 노동을 중시하는 농촌 자치 공동체인 키부츠는 초기 이스라엘의 사회주의 지향성을 상징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에는 유대교의 종교 원칙이 사회를 규율해야 하고, 유대교 정체성이 전면에 드러나기를 원하는 종교적 분파도 있었다. 이들은 초기 이스라엘 엘리트에서는 소수였지만 역시나 막강한 사회적 힘이 있었다. 게다가 세계 전역에 흩어져 고향도 언어도 달랐던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종교 이외에 무엇이냐는 이들의 질문을 세속주의자들이 완전히 물리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세속주의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은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네 차례의 중동 전쟁을 거치며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힘을 합쳤다. 갈등은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안보를 확보한 이후에 커졌다. 이스라엘은 1985년에 사회주의 정책 대신에 시장 자본주의를 대폭 수용하면서 변화의 길을 걸었다. 한편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공적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급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유대교 원칙을 강조하는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도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확보해 갔다.

인구 구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소수에 불과했던 초정통파 유대인들은 현대문명보다 종교 전통을 따르는 공동체를 만들어 높은 출산율로 인구를 크게 늘렸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이들의 인구 비중이 13%다. 그렇게 1990년대부터 시장경제와 종교적 보수주의를 강조하는 이스라엘 우파는 사회주의와 세속주의를 주창했던 이스라엘 좌파를 앞지르며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고, 이때 탄생한 총리가 바로 벤야민 네타냐후였다.

7월24일 네타냐후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이스라엘 청년들 ⓒAP 연합

'유대인들의 국가'와 '유대 국가'

21세기 들어 특히 청년층을 위주로 이스라엘의 특징적인 사회적·문화적 경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젊은 세속주의자들은 부모들의 사회주의 대신에 자유주의를 받아들였고, 사회문화 영역에서 진보적인 정책들을 서유럽 국가 수준으로 강력하게 추구하기 시작했다. IT 산업이 번창하는 이스라엘의 경제 중심지 텔아비브는 중동에서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성소수자 권리 행진이 개최될 수 있는 진보적 도시가 되었다. 반면 전통적인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유대교에 더 심취하게 된 또 다른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보수적인 종교 관습을 따르기를 선호했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도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곤 했다.

두 집단이 이스라엘의 국체를 정의하는 방식도 달랐다. 세속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국가'였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국체를 정의하는데 유대교는 다소 주변적이며, 유대인이 아닌 팔레스타인인들도 이스라엘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유대 국가'를 원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국가이며 다른 민족, 다른 종교집단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없다는 함의가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끊이지 않는 갈등, 홀로코스트와 중동 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이스라엘의 안보 불안은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성장하기에 더 좋은 토양을 제공했다. 네타냐후는 이들의 염원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고 종국적으로는 실현하기 위해 지난 몇 년에 걸쳐 대내외적인 강경책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일어난 자유주의, 세속주의자들의 반대 시위와 10월7일 전개된 하마스의 대대적인 공격은 네타냐후 반대자들이 여전히 힘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아마 다음 질문은 건국 시기부터 지금 이스라엘의 청년층까지 이어지는, 아니 더욱 선명해진 정체성 논쟁을 이스라엘이 앞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국가인가, 아니면 유대 국가인가? 이스라엘의 진보진영은 팔레스타인과의 화해 및 세속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얼핏 보면 이 방향이 증오의 연쇄를 끊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상황은 간단하지 않다. 적대적 안보 환경 속에서 대다수 이스라엘인이 느끼는 안보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종교를 통한 애국적 결속을 주장하는 보수파는 계속 세력을 확대할 수밖에 없다. 어느 쪽도 쉬운 길이 아닌 가운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현재 상황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며 이스라엘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 그 어느 나라보다 자유로운 텔아비브 청년들과 그 어느 나라보다 보수적인 예루살렘 청년들은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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