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늙어갈 때 서로 돌보는 ‘새 가족’ 생긴다면
혈연과 가족
병원서 수술 때 보호자 필요
혈육·배우자 ‘부양의무자’ 제한
‘사랑 있는 관계’라면 동반자
마지막까지 소통할 수 있도록
지난 9월 추석 사나흘 전부터 갑자기 기침이 나고 목이 아팠습니다. 감기겠지 하다가 혹시나 해서 추석 전날 보건소에 갔습니다. 만 60살 이상은 고위험군이라고 여전히 무료로 검사해주더군요. 젊은이에 비해서 노인은 면역체계가 약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위험할 수 있으니 그러는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내 나이 일흔, 생로병사의 여정에서 마지막으로 가고 있다는 현실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명절 내내 ‘나 홀로 자가격리’
추석 당일 오전 9시, 코로나19 확진 문자를 받았습니다. 지난해에 비해 유행이 심하지 않아서 일상에서 대체로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던 터라, 코로나19에 확진되었다는 통보는 뜻밖이었습니다. 많이 당황했습니다. 작년 10월에 이어 두번째였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에 딸이 사는 프랑스에 갈 예정이었으나, 여행 일정을 모두 취소했습니다. 13시간 동안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비행기에 타는 게 너무 힘들고 다른 승객에게도 폐를 끼치는 것 같았습니다. 여행 취소로 비용 손해도 컸지만, 무엇보다 몇 달 동안 저와의 여행을 준비한 딸에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추석 연휴 내내 나 홀로 자가격리를 했습니다.
남들은 북적거린다는 명절에 혼자 질병을 마주하면서 홀로 늙어가는 것에 관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어머님도 평생 고혈압으로 힘들어하시다가 결국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80대 중반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어머님의 혈압을 재드렸는데, 어머님은 제게 “마흔살이 넘으면 꼭 혈압관리를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외가 쪽 여러 어른들이 비슷한 질환으로 돌아가시기도 했으니, 어머님의 걱정이 이해됐습니다.
저도 피할 수 없었던 걸까요. 여러 해 전 현직에 있을 때, 건강검진에서 관상동맥 한쪽에서 40% 정도 협착이 발견됐습니다. 어떤 자각증상이 없었는데도 말이지요. 이후 의사의 권고에 따라서 약을 복용하면서 정기적으로 협착 진행 상황을 체크해온 게 몇 년입니다. 협착 진행이 더뎌 “괜찮을 수도 있겠다”며 내심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실시한 세번째 심혈관조영술에서 협착 정도가 90%까지 진행됐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예, 오래 쓰면 닳고 또 부서지기 마련이지요. 70년 가까이 작동을 했으니 각종 기관들은 조금씩 기능이 떨어집니다. 몸을 이루는 세포의 생성과 분열도 더뎌집니다. 그런데 마치 지금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살아온 저는 이 현실에 당혹하고 실망감이 컸습니다. 생성된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말씀이 다시 또렷이 마음속에 올라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심장혈관 안에 그물 같은 금속장치가 장착돼 삶의 끝까지 간다는 게 영 이상하고 내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올해 초, 어쩔 수 없이 심혈관 스텐트 시술을 받기 위해 2박3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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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관계 이어주는 생활동반자법
시술 자체만으로도 걱정과 긴장이 됐는데, 저에겐 스트레스 요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입원 수속 시 수술·시술 동의서를 받을 때 병원이 반드시 보호자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보호자 자격은 배우자나 혈육이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병원이 자기 편의대로 민법상 부양의무자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을 보호자로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저처럼 가족 모두 외국에서 사는 경우에는 참 난감한 상황이지요. 사정사정 끝에 간신히 일상에서 가까이 지내는 친구 한 사람을 보호자로 지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웃사촌’이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최소한 어떤 개인이 자발적으로 누군가를 보호하고 부양하겠다는 뜻을 피력한다면 거기에 찬물을 끼얹지는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병원의 ‘배려 덕’에 친구를 보호자로 등록할 수 있었지만, 개인의 선의만으로 사회가 잘 운영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도가 필요하고 법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생활동반자법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프랑스·영국·독일·스웨덴 등과 미국의 일부 주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지요. 자료를 찾아보니 2005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건강가정기본법’이 “실질적으로 가족 및 가정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가족 및 가정 형태에 대한 차별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법 개정을 권고한 적이 있더군요. 다양한 가족과 가정의 형태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지요.
2014년에는 진선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생활동반자법 초안을 만들었지만 ‘가족관계에 혼란을 주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우회 입법’이라는 보수 종교계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발의조차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9년이 지나 올해 4월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 등이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강고한 반대에 부딪혀 국회에 멈춰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유럽의 여러 선진국에 비해서 친밀한 관계에 관한 생각이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저처럼 홀로 늙어가는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쉽게 받기 위해서라도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족이란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물론 그 사랑이 가장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관계는 배우자, 또 혈연관계지요. 그러나 법적으로 이성 간의 배우자나 혈연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랑이 저절로 흘러 넘치고 보장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반면, 배우자나 혈연이 아니라 해도 서로가 깊이 헌신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종교의 수도공동체가 한 예가 되겠지요. 예, 핵심은 ‘사랑이 있는 관계’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가족관계에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최근에 다큐멘터리 ‘블루존의 비밀’을 아주 흥미롭게 봤습니다. 작가인 댄 뷰트너는 그리스·이탈리아·코스타리카·일본·미국 등에서 100살이 넘는 주민이 밀집해 사는 다섯곳을 찾아서 장수의 비법을 찾습니다. 그런 뒤 이런 지역을 블루존이라고 명했지요. 기후와 지리적 환경, 음식, 운동, 일, 봉사 등등의 요인 외에 그는 지역공동체의 중요성을 발견합니다. 같이 모여 지내다가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어지는 노인은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동네에서 함께 돌봅니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요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낸다는 것은 사실상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떠날 때 따스하게 보듬어줌을 받을 수 있도록 공동체 기반의 사회적 돌봄이 많아지면 참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마칠 거라는 걸 미리 알면 안도감과 평화 그리고 따스함과 즐거움 속에서 장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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