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없이 무슨 선거를 한단 말이오” [노원명 에세이]
대기업 CEO를 오래 지낸 노년의 경영인이 점심을 먹다 이런 말을 한다. 그는 보수주의자다. 그 앞에 ‘실용적’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모든 경영인은 실용적이고 보수적이다.
왕년에 그가 경영했던 기업의 노조는 지금도 강성으로 악명이 높다. 그 노조의 버릇을 잘못 들인 데는 그의 책임도 일정부분 있을 것이다. 그는 인정했다. “그렇소. 우리(경영진)가 노조에 후했지. 웬만한 것은 들어줬다고. 그때 원칙을 따지다 파국에 이르렀으면 지금 저 회사가 없을 것이오. 그 노조를 품고도 세계적 기업이 된 것, 그게 위대한 거요.”
이런 말은 교과서나 신문 사설에 쓸 수 없다. 그것은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다. 신문은 늘 ‘완전한 원’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원을 채우는 들쭉날쭉한 세부(세부는 늘 그런 법이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세부는 교훈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모순덩어리인 세부가 완전한 원을 구성한다는 것을 노경영인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는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이런 말을 했다.
“선거를 앞두고 돈줄을 줄이는 건 바보들이 하는 짓이라오. 그러면 선거에 지게 되어있소. 확장재정이 보수 정부의 원칙을 10%쯤 훼손한다고 칩시다. 선거에서 지면 90%가 훼손될 것이오. 90% 훼손을 막기 위해 10% 훼손을 감수하는 것, 그게 정치요.”
다시 말하지만 신문은 이런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나는 원칙이 훼손될 때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져버린 사례를 몇 가지 알고 있다. 10년쯤 전이라면 아는 척을 했겠지만 묵묵히 듣기만 했다. 세상이 대개는 ‘케바케’라는 것, 거기서 무슨 일관된 공식을 도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경영인과 오찬을 가진 직후에 정부 여당이 총선용 요술 주머니(김포 편입, 공매도 금지 등)를 던지기 시작했다. 신문기자의 눈에는 영락없는 포퓰리즘이다. 노경영인은 ‘이제 뭐 좀 깨달았네’ 할 것이다.
“균형을 유지하면서 계속 항해하기 위해 그는 배의 방향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바꾼다…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장 중요한 목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다.”
처칠은 노예제 폐지라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모순되고 기회주의적 면모를 보인 링컨을 이렇게 평가했다. 난파당하느니 백번이라도 둘러 가는 게 옳다고 링컨은 생각했고 처칠은 그런 링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정치에서는 피해를 줄였다고 해서 좋게 평가해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더 나쁜 결과가 실제로 나왔을 것이라고 증명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헨리 키신저의 역작 ‘외교’에 나오는 문장이다. 정치의 본질을 이처럼 투명하게 보여주는 문장도 드물다. 윤석열 정부가 아닌 문재인 2기 정부가 나왔으면 나라가 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지만 그들은 소수다. 나라가 망했을 것이라고 증명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보여줘야 하고 그러려면 선거에 이겨야만 한다. 역사에선 승리가 선이고, 패배가 불의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과서나 신문 사설에는 안나오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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