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온 아이콘

서울문화사 2023. 11. 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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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진 파일럿 마제텍은 상징적인 시계가 될 상징의 씨앗이 충분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론진 파일럿 마제텍. 개인 기호에 따라 좋고 싫음이 확실히 갈릴 생김새다.
시계 케이스 뒷면은 스테인리스스틸로 막았다. 요즘 시계 경향과 다르지만 옛날 시계를 고증한 디테일이다. 1930년대 시계와 차이점도 있다. 오리지널 마제텍은 부품들을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뒤를 막았고 고정 나사는 없었다. 나사를 추가한 만큼 방수 성능이 높아졌을 것이다. 사진 기준 위쪽의 스크루 크라운을 봐도 방수 성능이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덕분에 이 시계의 방수 성능은 수심 100m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스위스 시계 브랜드는 모두 남다른 점이 있다. 기술이든 사연이든 생산 역량이든. 론진은 기술, 생산 역량 모든 면에서 사연이 있는 시계 브랜드다. 올해 2월 출시된 론진 마제텍은 이 사연 많은 회사의 과거와 현재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물건이다. 시계를 둘러싼 무형의 역사를 제외하고도, 물건 자체로도 오랫동안 들여다볼 요소가 충분할 만큼 견고하게 잘 만들어진 제품이다.

시계는 보수적인 물건이기 때문에 남다르게 생긴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시계가 남달리 생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공학적 혹은 역사적. 마제텍은 역사적인 경우다. 이 시계의 역사적 원형은 1935년에 만든 Ref. 3582 시계다. 체코슬로바키아 공군 파일럿을 위해 만들어진 파일럿 시계였다. 파일럿 시계는 확고한 목적이 있다. 언뜻 봐도 눈에 잘 띄는 높은 시인성. 그래서 숫자가 크고 바늘이 굵다.

여기까지는 흔히 나오는 이야기인데 질문을 더 이어볼 수도 있다. 왜 파일럿 시계는 숫자가 커야 할까. 그 당시 비행기 조종은 하늘을 나는 모터바이크 조종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왜 다른 시계 브랜드도 많은데 론진이 이런 시계를 만들었을까. 생산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론진은 스위스 시계 업계 중 대량생산의 문법을 받아들여 스위스 제품의 품질과 높은 생산량을 동시에 구현한 역사적 장점이 있다. 론진은 마제텍 외에도 1940년대에 다양한 국가의 군용 손목시계를 제조했는데, 론진의 우수한 생산 역량 전통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전통은 아직도 살아남아 21세기의 론진 시계라는 물증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20세기 시계의 역사적 디테일은 21세기 미적 실루엣이 된다. 2023년의 마제텍은 1935년 체코 파일럿 워치의 충실한 복각이다. 쿠션을 닮아 이름도 ‘쿠션 케이스’인 시계의 원형이 잘 구현되었다.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많다. 가장 큰 차이는 ‘마제텍’이라는 이름 자체다. 마제텍은 원래 ‘체코 군대의 재산(Majetek Vojenske Spravy)’에서 따온 말인데, ‘마제텍’ 부분만 애호가들이 별명처럼 부른 것이다. 론진이 애호가의 별명을 정식 상품명으로 격상시킨 셈이니 옛날이야기의 오라를 오늘날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겉보기엔 생김새가 중요하나 막상 차면 착용감이 훨씬 중요하다. 크기가 크고 생김새가 남다른 시계는 손목에 찼을 때 걸리적거릴 수도 있다. 물론 2백여 년 가까이 살아남은 시계 대량생산의 명가 론진은 나무랄 데 없이 매끈한 손목시계를 만들었다. 폭은 43mm로 큰 편이지만 시계의 착용감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러그 투 러그’라는 말로 설명되는 세로 길이가 중요하며, 가로와 세로 길이를 합산한 균형감이 시계의 착용감을 만든다. 론진 마제텍은 그런 면에서 훌륭하다. 러그 투 러그가 51mm로 짧고 손목에 얹히는 하방의 곡면 실루엣도 잘 구현되었다. 시계를 착용한 에디터의 손목둘레는 15.5cm로 꽤 가는 편인데도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스테인리스스틸 자체의 무게가 좀 있으니 하루 종일 차면 묵직하긴 할 것이다.

잘 만들어진 손목시계를 찰 때의 재미 중 하나는 나 혼자서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반사광을 구경하는 것이다. 론진 파일럿 마제텍은 충분히 즐거울 만큼 잘 깎여 있다. 위에서 본 모습은 쿠션형이다. 전반적으로 광택 없이 빗질한 듯한 무늬만 있는 브러싱으로 처리하고, 가장자리 부분만 반짝이는 폴리싱 처리로 마무리했다. 옆에서 보면 한층 입체적이다. 폴리싱을 자제하고 전반적으로 브러싱 마무리해 액세서리보다는 기계 느낌이 많이 난다. 각진 면이 많아 실제로 찼을 때 걸리적거릴 수도 있는데, 주요 각을 날카롭게 살리면서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마무리한 게 론진의 저력이다. 언뜻 봤을 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각이 많으면서도 착용감을 좋게 만드는 건 쉽지 않다. 싼 시계를 한 번 차보면 알 수 있다.

케이스 속 다이얼도 복각과 재창조 사이에 있다. 파일럿 시계의 정체성에 맞게 시간을 보여주는 인덱스는 숫자를 크게 표시했다. 숫자는 단순 인쇄가 아니라 살짝 위로 도드라져 입체감이 좋다. 약간 누렇게 바래 보이는 듯한 색감은 인위적으로 만든 ‘색이 바랜 노랑’이다. 원래 이렇게 누런색은 야광 소재인 라듐이나 트리튬이 직사광선에 노출될 때 드러난다. 이 두 가지 소재는 방사성 물질이라 지금은 쓰지 않고 이제 시계의 야광으로는 슈퍼 루미노바를 쓴다. 보통 슈퍼 루미노바는 아주 밝은 연두색 톤을 주로 쓰는데 마제텍은 약간 바랜 느낌으로 색을 다듬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낡은 느낌이 만들어진다.

낡은 느낌이지만 낡지 않았다. 옛날 것 같지만 완전히 옛것은 아니다. 오늘날 디자인 아이콘은 모두 그런 역설을 충족시킨다. 이 시계의 무브먼트가 그 예다. 론진 파일럿 마제텍 안에는 론진의 L893.6 무브먼트가 들어 있다. 기능은 시, 분, 초에 날짜도 없다는 점에서 요즘 분위기와 잘 맞는다. 대신 파워 리저브가 72시간으로 길고 COSC 기준을 충족시킬 만큼 정확성도 높다. 실리콘 헤어스프링도 의미 있는 스펙이다. 헤어스프링이 시계의 정확성에 영향을 미치는데, 헤어스프링이 실리콘일 경우 자성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 멀끔한 무브먼트를 가려뒀다는 것도 재미있는 특징이다. 시계의 원형에 충실하겠다는 의미다.

론진 파일럿 마제텍

레퍼런스 L2.838.4.53.9(갈색 스트랩, 박스 에디션) 케이스 폭 43mm 무브먼트 L893 케이스 두께 13.3mm 구동 방식 오토매틱 케이스 소재 스테인리스스틸 시간당 진동수 25,200vph 방수 100m 한정 여부 없음 버클 핀 버클 기능 시·분·초 표시 스트랩 소가죽 가격 5백20만원(박스 에디션), 일반 에디션은 5백10만원
시계를 기울여보면 론진의 케이스 가공 기술과 정성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정도 가격대의 스위스 시계에서 이만큼 각면과 곡면을 많이 잡고, 폴리싱과 브러싱을 섞어 가공하는 시계는 많지 않다.

케이스 이외의 부품도 시계의 인상에 영향을 미친다. 론진 마제텍은 스트랩이나 상자도 흥미롭다. 스트랩은 역시 레트로 느낌이 나는 두꺼운 소가죽이다. 처음에는 잘 구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빡빡하나 며칠 차면 사용자의 팔 모양에 맞게 감길 것이다. 버클은 핀 버클, 레트로 분위기와도 잘 맞고 제조사의 단가 면에서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가죽 스트랩은 10만원을 추가하면 재활용 폴리에스터로 만든 나토 스트랩과 스트랩 교체 공구가 추가된 ‘스페셜 박스 세트’로 살 수 있다. 나무 상자의 존재감도 상당해서 실구매자의 만족도가 높을 듯하다. 이 시계와 비슷하거나 이보다 가격이 높은 시계 중 종이 상자를 주는 곳도 많다.

가격을 이루는 요소라는 점에서 론진은 언제나 높은 점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론진은 두말할 나위 없는 고가 고급 시계를 만들지만, 이 가격대의 시계 중 론진만큼의 성능이나 세공을 보이는 곳은 많지 않다. 각면과 곡면을 동시에 살린 케이스 디자인, 기꺼이 폴리싱과 브러싱을 섞는 수고를 하면서 만들어낸 특유의 광택감과 입체감, 자사의 전통에서 가져온 상징적인 실루엣, 무브먼트의 높은 성능과 요즘 분위기에 맞춘 긴 파워 리저브, 결과적으로 단순해지기 위한 과정에서 공을 들인 다이얼 디자인. 기계식 시계의 구조와 생산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면 론진 이상의 만듦새를 찾기 힘들 것이다.

바로 여기서 론진의 고민이 시작된다. 론진의 장점은 가격 대비 상품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가 시계는 가격 대비 상품성 말고도 가치를 이루는 변수가 많다. 론진은 늘 후자에서 애매하다. 고가 시계를 고를 때 남들의 시선이나 재판매 요율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론진의 순위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반대로 시계라는 물건 자체를 좋아한다면 지금처럼 론진 구매하기 좋을 때도 없다. 조금만 유명해져도 시계를 사기 위해 줄 서고 웃돈을 얹어줘야 하는 시대다. 반면 이렇게 역사적인 론진 마제텍을 사기는 아직 별로 어렵지 않다.

세상의 손목시계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번쩍일 때 멋진 시계, 좀 긁히고 닳았을 때 멋진 시계. 전자의 시계는 평소에 잘 보관하다가 특별한 날만 차고 나가는 게 좋고, 후자라면 긁히는 게 멋이려니 생각하고 매일매일 차는 게 좋다. 론진 파일럿 마제텍은 단연 후자에 속할 시계다. 가죽 스트랩과 스틸 케이스에 세월의 때가 쌓일수록 이 시계는 멋지게 사용자에게 동기화될 것이다. 지금의 모습보다 주인과 함께할 3년 후, 5년 후가 더 기대되는 시계가 론진 마제텍이다.

케이스 측면은 브러싱 처리, 케이스 측면과 윗면이 맞닿는 부분만 미세한 폴리싱 처리, 케이스 옆의 ‘1935’를 새겨 붙인 금속 디테일, 동전 가장자리처럼 홈을 파고 폴리싱 마무리한 베젤, 이 모든 게 디테일이다.
2010년대 고급 손목시계는 폴딩 버클을 많이 썼는데 요즘은 다시 핀 버클을 쓰는 추세다. 론진 파일럿 마제텍도 핀 버클을 썼다.
론진 마제텍 케이스의 견고한 절삭을 보여주는 측면.

+ 끌림 요소

◦ 시각적으로 남다를 뿐 아니라 확실한 역사적 맥락도 있는 디자인.

◦ 높은 무브먼트 퍼포먼스, 요즘 세상에 맞는 딱 필요한 시·분·초 기능.

◦ 나무 상자나 별도 나토 스트랩 등 가격 대비 훌륭한 상품성.

- 망설임 요소

◦ 내 눈에만 좋아 보일 수도 있는 남다른 디자인.

◦ 굳이 ‘스페셜 패키지’를 만든 좀스러움.

◦ 약간 심심해 보일 만큼 여백이 큰 다이얼의 비례감.

Editor : 박찬용 | Photography : 박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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