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문화] (71)탐라, 동아시아 최초 '국제해전' 어엿한 참전국
"그동안 너무 소홀히 다뤄…고대 독립국 탐라 기억해야"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탐라(耽羅).
탐라는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에 참전하기도 하는 등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에 그 이름을 올리며 기나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섬나라 탐라, 잃어버린 천년을 깨우다'란 주제로 특별전시를 하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탐라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본다.
고대 독립국 탐라, 백강전투 참전하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맹주 세 나라가 자국의 운명을 걸고 싸운 전쟁이 역사적으로 세 차례 있었다.
1594년 조선과 일본, 명나라가 맞붙었던 임진왜란.
1894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일전을 벌인 청일전쟁.
그리고 이보다 1천년 넘게 앞선 663년 8월 한반도 서해안 백강(현재의 '금강'으로 추정) 하구에서 벌어진 백강전투다.
백강전투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나라와 신라가 결성한 나당연합군,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려는 백제부흥군과 왜(지금의 일본) 연합군이 벌인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이었다.
백제는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들이 끌려가면서 멸망했다.
하지만 백제에 남아 있던 지방세력이 힘을 합쳐 백제부흥군을 결성해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최후의 일전 백강전투가 벌어졌다.
동아시아 주요국이 수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물러설 수 없는 일대 격전을 벌였고 이로 인해 역사가 바뀌었다.
백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지면서 사실상 신라의 삼국 통일을 위한 최대 승부처가 됐고, 백강전투에서 참패한 왜는 국호를 일본으로 바꿔 새출발했다.
보통 당나라와 신라, 백제부흥군, 왜 등 4개국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참전국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탐라'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 구당서(舊唐書)를 보면, 663년 탐라의 '백강전투 참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왕자 부여충승(夫餘忠勝)·부여충지(夫餘忠志) 등이 사녀(士女), 왜인 무리와 더불어 탐라국 사신(耽羅國使)과 함께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고 한다." (구당서, 권84, 유인궤 열전)
탐라가 백제부흥군, 왜와 함께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참전했지만 결국 패배했다는 기록이다.
역사적으로 중대한 국제전쟁의 중심에 작은 섬나라 탐라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왜는 당시 백제와 친교를 맺고 있었고, 탐라는 백제에 조공을 바치는 조공국이었다.
5∼10세기경 탐라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비록 동등하지 않았지만, 작지만 강한 독립적인 정치체였다.
탐라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과 화산 섬이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바다를 매개로 주변국들과 활발하게 대외 교류하면서 독립국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김나영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학예사는 "탐라는 백제에 공부(貢賦), 즉 세금을 내며 관계를 유지하는 부용국(附庸國, 큰 나라에 종속돼 지배를 받는 작은 나라 관계)이었다"며 "탐라는 고대국가 반열에 있었던 백제와 동등하진 않았지만, 백제가 섣불리 침략할 수 없었던 작지만 강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탐라의 독립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는 백강전투 이전인 선덕여왕 14년 645년 신라에 세워진 황룡사 9층 목탑에서도 드러난다.
황룡사 9층 목탑은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 침입 당시 불에 타 현재는 터만 남아있지만 관련 내용은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선덕여왕 때 승려 자장의 건의로 만들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은 적대국들의 침범과 재앙을 막아주길 희망하는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층마다 일본, 중화, 오월, 말갈 등 경계해야 할 주변 9개국을 새겨 넣었다.
이중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이 위치했고 탐라는 4층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신라가 탐라국을 자신을 위협할 만큼 잠재력을 지닌 나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탐라의 위상이 상당 수준에 있었음을 증빙하는 단서라고 학자들은 풀이한다.
백제 멸망을 기점으로 탐라의 대외 관계는 바뀐다.
탐라는 사대하며 동맹을 맺었던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 당나라, 신라를 상대로 다각적인 교섭을 하며 급변하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그 이후에도 탐라는 한반도에 새로 등장한 후삼국, 고려와 마주해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외교관계를 이어간다.
후삼국시대인 925년(〃 태조 8년) 고려에 특산품을 바치면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이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에 본격적으로 사대함으로써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받고 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하지만 탐라는 1105년(〃 숙종 10년) 고려의 지방 행정단위의 하나인 탐라군(耽羅郡)으로 편입된다.
이어 1153년(〃 의종 7년) 탐라현(耽羅縣)으로 강등돼 현령관이 파견됨으로써 자치권을 완전히 잃었다.
몰락한 탐라의 사람들은 백제와 마찬가지로 탐라의 재건을 꿈꿨다.
1168년(〃 의종 22) '양수(良守)의 난'을 시작으로 1375년(〃 우왕 원년) '차현유(車玄有)의 난'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의 탐라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항쟁이자, 잃어버린 탐라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고려사'에는 이를 단순 '민란'이 아닌 '반란'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탐라국의 독립을 우려하는 고려 조정의 경계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은 "탐라(耽羅)는 2천년 전에 제주섬에 건설된 고대 문명국가였다. 지배층의 성립, 해민(海民)들의 교역을 통한 국부(國富) 창출, 신라를 위협할 정도의 해상 대외 진출 등 탐라는 천년 사직을 유지한 해상왕국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탐라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등장하며 활발한 교역을 펼치고, 고구려·백제가 일찍 멸망해도 탐라는 존속했다는 기본 사실을 우리는 너무 소홀히 다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어 "섬나라 '탐라'(耽羅)는 바다 건너의 고을 '제주'(濟州)로 불리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지만 고립된 '섬'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아시아 바다를 무대로 주변 국들과 외교하며 천년을 이어온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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