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약혼녀와 잠자리 갖다 들통났다네요”...썸남의 과거를 알게된 그녀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3. 11. 12.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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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00] ‘브리짓 존스의 일기’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패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시간은 금으로도 살 수 없는 희소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경험하기에 앞서 기존 평가를 참고한다.

식당에 먼저 다녀온 사람의 리뷰를 읽고, 영화를 이미 본 관객의 별점을 살펴본다.

그렇게 우린 영 아닌 식당과 작품을 거를 수 있다. 신뢰할 만한 인물의 평가를 들어보는 것은 실패하거나 실망할 가능성을 줄여준다. 시간을 낭비할 확률을 낮춰준다.

브리짓 존스(왼쪽)는 모친이 마련한 새해 식사 자리에서 마크 다시(오른쪽)를 만나 인사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 대해 늘어놓는 험담을 듣게 된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던 여성의 이야기다.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브리짓(르네 젤웨거)은 한 남자를 직접 알아보기에 앞서 판단할 만한 근거를 찾는다.

그중 하나가 타인의 평가다. 브리짓이 그 남자에 대해 수집한 정보 중엔 그가 파렴치한이라는 증언이 있었다. 결혼을 앞둔 친구의 약혼녀와 잠자리를 갖다가 현장에서 발각됐단 것이다.

그러나 해당 정보만 제외한다면, 남자는 누구보다도 착하고 성실해 보인다. 과연, 브리짓은 이 남자의 평판에도 한번 사귀어 보겠다는 결심을 내릴 것인가.

마크 다시는 ‘킹스맨’으로 인기 많은 콜린 퍼스가 연기했다. ‘킹스맨’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던 그는 이 작품 초반부에서 최악의 매너를 보여준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소개받은 남자가 내 험담을 했다…“나도 별로였는데”
이야기는 브리짓의 서른두 살 새해 첫날을 비추며 시작된다. 브리짓은 엄마가 연례행사로 이웃들을 초대해 개최하는 ‘칠면조 카레 뷔페’에 참석한다.

그녀 모친은 브리짓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변호사 마크 다시(콜린 퍼스)를 소개하는데 매너가 별로다. 남자는 브리짓과 인사를 나눈 뒤 돌아서서 본인 어머니에게 브리짓의 험담을 한다.

“맞선은 필요 없어요. 특히나 수다쟁이에 패션 감각 빵점인 골초 주정뱅이 노처녀는 싫다고요.”

브리짓 몰래 한 이야기였지만, 브리짓은 모두 듣고 상처를 받는다.

마크 다시가 자신에게 무례를 범한 날, 브리짓은 집에 돌아와 ‘올 바이 마이 셀프(All by myself)’를 격정적으로 부른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밝은 톤으로 연출됐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브리짓은 억울했다. 자신도 그 남자가 딱히 맘에 들어서 상냥하게 대화했던 게 아니다. 그녀 또한 순록이 그려진 스웨터를 입은 그의 패션 센스가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았던 것은 그게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 브리짓 존스. 그녀 일기장엔 그날의 체중과 음주량, 감정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브리짓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기 관리에 고삐를 조이게 된다. 적극적으로 살기로 결심한 그녀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일기엔 그날의 체중과 피운 담배 개비, 음주량, 자신에게 생긴 일과 느낀 점을 적었다.

“난 불현듯 깨달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평생 혼자서 술이나 마시다가 뚱보로 죽어 3주 후 독일산 셰퍼드한테 반은 뜯어 먹힌 채 발견될 것임을”

브리짓의 옆에는 좋은 친구가 많다. 창피한 일을 당했을 때, 다독여주기보다는 두고두고 놀려주는 친구들이다. 그런 놀림이 외려 위로가 된다는 건 신뢰가 돈독한 사이라는 의미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바람둥이 남자에게 뭘 기대했을까
체중 감량을 비롯한 자기 가꾸기에 돌입한 브리짓은 본인 회사의 상사와 데이트하게 된다.

다니엘 클리버(휴 그랜트)란 이름의 그 남자는 출판사 편집장이다. 잘생긴 얼굴에 지성미를 갖춰 여자에게 인기도 많다.

바람둥이는 만나지 말자는 게 브리짓의 새해 결심이었으나, 다니엘에겐 마음을 연다. 타인의 매력에 끌리는 인간 본능은 새해 결심 같은 건 가볍게 이기는 힘을 지니고 있다.

브리짓은 다니엘 클리버(왼쪽)가 바람기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유혹에 마음을 연다. 이 과정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다니엘을 연기한 배우 휴 그랜트의 매력이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그러나 다니엘은 불을 보면 뛰어들고야 마는 불나방처럼 여자를 보면 일단 들이대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였고, 브리짓을 두고 바람을 피우고 만다.

이는 결과적으로 브리짓에겐 좋은 일이었는데, 실연의 아픔에 자포자기하는 대신 각성하고, 직장을 떠나 본인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일자리를 얻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엄마가 소개해줬던 남자, 다시 말해 자신을 무시하는 줄로만 알았던 마크 다시에게 인생 최고의 고백을 받는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좋아해요.”

브리짓은 엉뚱한 매력이 가득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미지 제공=유니버설픽처스]
친구의 연인과 관계 맺은 남자 “내게는 진실하란 법이 있을까”
결국 브리짓의 고민은 ‘이 남자의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로 귀결된다. 자신에게는 최고의 마음을 보여준 남자이지만, 본인의 오랜 친구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남자이기도 하다.

친구의 약혼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과거는 한 사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기본적으로 연인 사이에도 행위규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일 수 있다.

방송국에 취직한 브리짓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약한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그렇기에 타인의 결혼이나 연인 관계를 언제든 깰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연인과 형성한 관계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단 것이니, 그가 얼마나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충동적인 인물인지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외도 전력이 있는 사람과 연애·결혼을 가급적 피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제인 오스틴 소설 ‘오만과 편견’을 모티브로 삼았다. 영국인이 사랑한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이기에 콜린 퍼스, 휴 그랜트 등 두 남자 주연 배우가 모두 영국인이다. 미국인인 르네 젤웨거는 사랑스러운 브리짓을 연기하기 위해 영국식 억양을 연습했다. [사진 제공=민음사]
알고 보니, 친구의 약혼녀와 잠자리를 가진 건 마크 다시가 아닌 바람둥이 다니엘이었다는 게 극의 반전이다. 브리짓은 마크 다시에게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다니엘이 거짓말했음을 발견한다.

오해를 씻은 두 사람이 연인이 돼 포옹하는 장면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류의 행복한 동화처럼 책장을 따스하게 닫는다.

설사 판타지라 하더라도 우리에겐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바라보게 해줄 만한 서사가 더 많이 필요하다. 한화로 327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3,697억원의 티켓 수입을 올린 것은 ‘그럼에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는 판타지일지 모른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줄 사람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겐 세상 한 구석엔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하게 만드는 서사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런 따뜻한 이야기가 우리 마음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소중한 인연을 만들기 위해선 실패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된 신(scene)을 하나만 더 살펴보자. 연인이 된 줄 알았던 마크 다시가 브리짓의 일기를 읽는 장면이 있다. 거기엔 마크 다시에 대한 험담이 가득하다. 어쩌면 브리짓의 ‘진심’을 담은 글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감독은 일기를 읽고 실망한 줄 알았던 다시가 브리짓에게 새 일기장을 선물하도록 하며, 관객을 미소 짓게 한다.
같이 볼 만한 영화로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매치 포인트’를 추천한다. 두 작품은 일기장이 서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는 점에서 닮았다. ‘매치 포인트’는 ‘씨네프레소’ 49회차에서 다룬 바 있다. [사진 제공=퍼스트런]
왜 이런 장면을 넣었을까.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외부의 정보로 남을 쉽게 판단해버리는 세태에 대한 이야기다. 브리짓은 바람둥이 다니엘의 말만 듣고, 마크 다시라는 좋은 남자를 제대로 볼 기회를 놓칠 뻔했다.

한 사람의 진실을 알기 위해선 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영화나 음식을 남의 별점만 보고도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인간은 복잡다단한 존재인 것이다. 남들은 다 손가락질하고 욕해도 나한테는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영화나 식당도 직접 경험해보는 게 제일 정확하다. 온갖 평점 사이트에서 낮은 점수를 준 작품 가운데 자기 취향엔 맞는 게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1000만 관객이 보고, 칸 영화제 수상을 했다고 한들 자기 마음에 꽂히지 않으면 내 인생엔 별 의미 없는 영화가 된다. 하지만 모두가 외면했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에 한 칸을 차지한다면 그건 ‘인생 작품’이 될 것이다. 나에게 좋은 인연이란 1000만 명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을 한 칸이라도 내어주고 싶은 감동의 순간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일기 또한 마찬가지다. 브리짓이 마크 다시에게 사과하며 말하듯 “일기는 헛소리로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온갖 잡생각이 스치기 마련이고, 만약 누군가가 내 머리를 들여다보고 진심을 파악한다면, 그것보다 억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모두 내 진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한 사람이 직접 쓴 일기‘조차도’ 타인을 파악하는 정보로선 불완전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직접 대화 나누고, 시간을 보내며 그에 대해 판단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단 얘기다. 일기도 그럴진대 우리는 외부의 정보를 근거로 너무 많은 인연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소중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선 어느 정도 실패와 실망의 가능성을 끌어안아야 함을 영화는 보여준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포스터.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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