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떠나고 달리기 시작했다 [반려인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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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떠나고 빈 시간 동안 무얼 했느냐고 물으면 어리둥절하고도 머쓱해진다.
꽤나 달린 줄 알았는데 고작 78시간이라니, 개를 돌보던 시간에 비하면 턱없이 적어서 대체 남은 시간 동안 무얼 한 건지 미스터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책 말고도 개가 쓰던 물건, 쓰려고 샀지만 쓰지 못한 물건, 포장도 뜯지 않은 선물받은 물건들을 챙겨서 보냈다.
고맙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내 개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옷과 선물받은 것 사이에는 대체로 상당한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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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떠나고 빈 시간 동안 무얼 했느냐고 물으면 어리둥절하고도 머쓱해진다. 그러게요, 전 대체 뭘 한 걸까요. 아무리 찬찬히 돌이켜봐도 별로 한 일이 없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변명거리는 안 되겠지만 그나마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달리기를 좀 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에 기록된 걸 보니 이번 10월에는 105㎞를 달렸다. 올해 들어 달린 걸 합치면 757㎞이고 78시간쯤 된다고 한다. 꽤나 달린 줄 알았는데 고작 78시간이라니, 개를 돌보던 시간에 비하면 턱없이 적어서 대체 남은 시간 동안 무얼 한 건지 미스터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월별로 기복이 있는데 제일 많이 달린 건 개를 떠나보낸 직후인 2월과 3월이다. 2월엔 118.8㎞, 3월엔 138.4㎞를 달렸다. 과연 그때 그랬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몇 번인가 시야를 흐릿하게 가리는 눈물을 훔치며 달렸던 장면이 떠오른다.
날이 더워지고 수온이 오른 후로는 바다에 나가느라 많이 달리지 못했고 다시 100㎞를 넘긴 건 3월 이후 이달이 처음이라고 한다. 스마트워치를 차고 달리면 달린 거리와 속도, 심박수, 소모한 칼로리, 오르내린 고도와 지도상의 위치 등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주는데, 과연 이 물건 없이도 내가 이만큼 달릴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좀 자신이 없다. 가끔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켜 그날 달린 기록을 날려먹는 일이 있는데 그럴 때면 아주 값비싼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커다란 상실감이 들고 그런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뻔뻔하게 구는 스마트워치를 향한 증오심이 불길처럼 타오르곤 하는 것이다.
처음 달리기 시작한 후 한동안은 음악 없이는 달리는 게 어려웠고 플레이리스트를 관리하는 게 달리기할 때 제일 중요한 숙제였다. 요즘은 오히려 음악이 없는 편이 달리기 쉬운 걸 보면, 언젠가 스마트워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도 올까?
얼마 전엔 곧 열릴 유기동물 후원 바자회에 몇 가지 물품을 기증했다. 주로 내가 쓰고 그린 책들인데, 그냥 나갔다가 안 팔리고 짐으로 남을까 봐 한 권 한 권 빠짐없이 사인을 했다. 그랬다가 더 안 팔리는 건 아닐지 불안한 기분도 들지만 이제 내 손을 떠난 일이니 책들에게 바자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빈다.
책 말고도 개가 쓰던 물건, 쓰려고 샀지만 쓰지 못한 물건, 포장도 뜯지 않은 선물받은 물건들을 챙겨서 보냈다. 과분하게도 개는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많이 받았다. 먹을 것과 옷가지가 많았다. 먹을 수 있는 건 먹였고 나이 때문에 먹기 어려운 건 아는 개들에게 나눠주었다.
옷가지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다. 고맙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내 개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옷과 선물받은 것 사이에는 대체로 상당한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도 바자회 신의 축복을 기원한다.
어쩌면 선물하는 이와 받는 이의 취향 차이로 집안 어딘가에 쓰지 않을 물건이 쌓여가는 현상은 대자연의 섭리 같은 것일까? 그런 생각으로 어떤 특별한 날 누군가 내게 받고 싶은 선물을 물어오면 나는 그냥 달지 않은 술을 사 오라고 말하는 편이다. 757㎞를 달리고도 뱃살이 쏙 빠지기는커녕 4㎏이 불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우열 (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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