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승리한 스위스국민당, 그 비결은 이주민 혐오?
10월 초 막을 내린 올해 취리히 국제영화제의 주빈국은 한국이었다. 한국 영화 11편이 소개됐고, 덕분에 나는 취리히 한가운데서 (대다수 비한국인 관객과 달리) 자막 읽는 고생 없이 한국 영화를 감상하는 사치를 누렸다. 그중 한 편이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다.
영화는 대규모 지진으로 한국 땅이 초토화된 가운데 무너지지 않고 남은 단 하나의 건물로 추정되는 ‘황궁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살 곳을 잃은 ‘외부인’들이 아파트를 찾아오자 주민들은 902호에 사는 김영탁(이병헌)을 대표로 선출한 뒤 이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명화(박보영)가 “그래도 다 같이 살 방법을 먼저 찾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이라고 소수의견을 내지만 묵살당한다. 외부인들을 쫓아낸 주민들은 ‘시스템’을 세운다. 치안을 책임지고 아파트 밖에서 식량을 구해오는 ‘방범대’, 제한된 식량과 자원을 분배하는 ‘배급대’,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시설을 재정비하는 ‘정비대’, 치료와 보건을 담당하는 ‘의료대’가 구성된다.
대표 아래 각 부처가 자리잡은 이 상황은 ‘유사 정부’를 연상시킨다. 이 정부의 구성원들은 비장한 태도로 슬로건을 외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물론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다. 하지만 뭔가 꺼림칙하다.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프랑스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의 “프랑스인들을 위한 프랑스(La France pour les Français)”, 스페인 극우 정당 복스(VOX)의 “스페인인 먼저(Los españoles primero)” 같은 표현이다. 모두 이주민에 반대하는 주장에 쓰이는 슬로건이다. 이제 갈피가 잡힌다. 이 영화에서 아파트는 무대장치에 불과하다. 영화가 제기하는 진짜 문제는 이주민 차별이다. 식량을 찾으러 나간 방범대원들은 자신들을 보고 두려워 도망치는 다른 생존자들을 향해 “바퀴벌레 같네”라며 웃는다. ‘바퀴벌레’는 유럽에서 인종, 종교 등이 다른 이주민을 차별적으로 비유하는 말이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바퀴벌레, 쥐, 뱀, 이, 기생충 등으로 묘사한 과거는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혐오감이 느껴지는 벌레나 동물에 빗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야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족을 고문하고 살해하기란 쉽지 않다.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가 당하는 고통이 자신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하지만 바퀴벌레나 쥐는 다르다. 연민과 공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들은 박멸의 대상이다. 거리낌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게 가능해진다. 나치뿐 아니라 집단적 동족 살해가 벌어진 인간 역사 대부분이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 불리는 이 같은 심리적 과정을 거쳤다. 인간 아닌 존재를 억압하고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 황궁 아파트 주민대표 김영탁은 외부인을 적발해 내쫓는 행위를 폭력이 아닌 ‘방역’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성과 차별, 혐오에 대해 연구해온 철학자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는 저서 〈인간 이하(Less than human)〉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외부인에게 편견이 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살육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그 편견을 겨냥한 세뇌와 선동이다. 세뇌와 선동의 목표는 적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살육에 대한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거부감을 무너뜨린다. 요컨대 비인간화는 전쟁에서 공격성의 고삐를 풀어버리는 특수한 역할을 한다.”
‘비인간화’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효율적인 심리적 수단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생쥐에 연민을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외부인에 대한 ‘악마화(demonization)’다. 우리에 비해 더 힘이 세고 악랄한, 우리 집단의 여성과 아이들을 해치고 우리의 재산을 빼앗고 나아가 우리 영토를 차지하고 말 외부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비어 있던 아파트를 차지한 외부인이 뒤늦게 집을 찾아온 주인을 칼로 찔러 쫓아내는 장면이 나온다. 김영탁은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에요. 바퀴벌레가 밥상머리 기어댕기면 식구 됩니까? 어떤 가족이 불 지르고, 칼로 쑤시고, 사람 죽이고 그럽니까.” ‘악마화’는 ‘비인간화’와 결합해 이주민을 결과적으로 괴물로 만든다(monsterization).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노예를 부렸던 고대 그리스의 지식인부터 식민지 원주민을 몰살시킨 유럽의 탐험가, 현대사회에서 흑인이나 무슬림 등에게 가하는 차별에 이르기까지 대상과 방식이 조금씩 바뀌었을 뿐 기본적인 기제는 그대로다.
외부인에 대한 차별을 부추기는 두 심리적 기제 중 ‘악마화’를, 나는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라는 스위스에서 최근 몇 주간 집중적으로 경험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정당은 스위스국민당(SVP)이다. 지난 10월22일 치른 연방 총선거를 앞두고 SVP가 벌인 캠페인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수준이었다. 겁에 질린 여성의 입을 남성의 손이 틀어막고 있는 포스터에는 “한 북아프리카인이 여성을 끔찍하게 성폭행했다. 중도 좌파의 실패한 난민 정책의 결과다. SVP에 투표하면 난민 혼돈을 막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주민=범죄자’ 프레임으로 1위 차지
또 다른 포스터에는 “루마니아인이 칼로 찌르다”라는 문구와 함께 날카로운 칼을 든 남성의 손이 부각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열린 국경이 우리나라에 폭력을 불러온다. 외국인 범죄자에 의한 폭력이 없는 날이 거의 하루도 없다. 폭력이 일상이 되면 안 된다. SVP를 선택하라!” SVP는 웹사이트와 X(옛 트위터) 계정, 그리고 메신저 앱인 와츠앱을 통해 이런 선정적인 사진과 문구가 포함된 포스터를 선거운동 기간 내내 퍼뜨렸다.
외국인 이주민들이 정말로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를까? 이것은 이주민 관련 연구에서 뜨거운 주제이지만 답은 간단치 않다. 경찰 기록만 보면 범죄자 중에는 외국인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고 경고한다. 원래 어느 집단이나 젊은 남성이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데, 이주민 중에는 하필 젊은 남성이 많다. 낯선 곳에서 안정적 직업을 구하기 어려운 현실이나 언어 장벽도 고려해야 한다. 같은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외국인을 신고하는 비율이 더 높다. 즉, 출신지만이 아니라 이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나 정부의 통합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SVP는 ‘이주민=범죄자’라는 단순한 프레임을 내세웠고, 선거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SVP는 28.6%의 득표율로 1위 정당 자리를 지켰다. 지난 총선보다 3%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전보다 득표율이 줄어든 녹색당(GPS, 9.4%)과 녹색자유당(GLS, 7.2%)의 표를 뺏어온 결과다. 스위스 유권자들은 기후위기보다는 늘어나는 이주민 숫자를 더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외국인들은 이런 캠페인과 선거 결과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와 남편의 출신지인 한국과 스페인은 SVP의 캠페인에서 직접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인 이주민’으로 분류되는 우리 가족은 SVP가 그은 선 밖으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SVP 선거 홍보물을 본 딸이 물었다. “엄마, SVP가 우리를 쫓아낼 수도 있어?”
외부인 돕는 사람이 ‘빌런’일까
SVP의 외국인 혐오 캠페인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선거 때마다, 또 국민투표를 할 때마다 논란거리였다. 2019년 총선거 때는 스위스 국기가 붙은 사과를 벌레 여러 마리가 갉아먹는 이미지를 사용했다. 다섯 마리 벌레의 몸에는 각각 빨강, 주황, 청록, 연두, 파랑 띠가 둘러져 있는데, 이 색깔은 SVP와 노선을 달리하는 주요 다섯 정당의 상징이다. “좌파와 착한 사람들이 스위스를 파괴할 것인가?”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착한 사람들’이란 이주민에게 열린 태도를 취하는 이들을 비꼬아 부르는 표현이다.
SVP의 혐오 캠페인이 해외에서 첫 주목을 받은 것은 2007년 총선거 때였다. 당시 포스터는 단순명료했다. 하얀 양 세 마리가 스위스 국기 위에 있고, 그중 하나가 국기 바깥으로 검은 양 한 마리를 발로 차 밀어낸다. 그 아래에는 “Sicherheit schaffen”, 즉 “안전 수립”이라는 두 단어가 크고 선명하게 쓰여 있다. 안전을 위해 스위스인(하얀 양)이 외국인(검은 양)을 스위스 영토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는 의미다. 너무나 간단하고 직관적인 그림이라, 설사 ‘안전 수립’이라는 독일어를 모른다 해도 이 포스터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어찌나 전 세계적으로 화제였던지, 당시 〈뉴욕타임스〉가 ‘이주, 검은 양, 그리고 스위스의 분노’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낼 정도였다. 기사는 “이 캠페인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인 스위스에서 이주민의 지위, 그리고 스위스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논쟁이 번지고 있다”라고 썼다.
이주민을 스위스라는 실한 사과를 갉아먹는 벌레 같은 존재로 비유(비인간화)하거나, 손에 칼을 든 범죄자로 비유(악마화)하는 SVP의 전략은 성공적이다. 1999년 이래 SVP는 매 선거에서 득표율 1위를 차지해왔다. 시기에 따라 힘을 얻기도, 잃기도 하는 유럽 다른 나라의 극우 정당들과는 달리 꾸준히 주류 자리를 지켜온 덕에 유럽 극우 세력 사이에서도 상징성이 크다. 이 때문에 SVP의 선정적인 선거 캠페인을 ‘벤치마킹’하려는 시도도 있다. 위에 언급한 ‘하얀 양, 검은 양’ 포스터는 나중에 극우 정당인 독일의 국가민주당(NPD)과 이탈리아의 동맹(Lega, 2017년 이전 명칭은 북부동맹·Lega Nord)이 거의 그대로 베껴 자국 내에서 이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주민 혐오 담화는 변방이 아닌 중심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이 유럽만의 문제일까. 취리히 영화제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 상영 후 감독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한 관객이 이 영화가 한국에서는 반응이 어땠냐고 물었다. 엄태화 감독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한국 관객 상당수가 명화를 ‘빌런(악당)’이라고 보더라”는 것이다. 다 같이 살 방법을 찾자고 하며 숨어 있던 ‘외부인’에게 음식을 나눠준 명화를 빌런이라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자원은 제한되어 있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었나. ‘바퀴벌레’들이 아파트를 습격하고, 주민들은 얼마 안 가진 것마저 잃는다. 한국 사회는 저출생으로 인해 앞으로 이주민을 더 많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명화를 빌런으로 보는 한국 관객이 많다는 점은 그 길에 만만찮은 과제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파트를 떠난 명화는 다른 식의 공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 동행한다. 감독은 이것이 “희망이자 질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다 같이 살 방법’에 대해.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