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걸린 '가습기살균제' 제조사 손배 인정…추가 소송 잇따르나[판결왜그래]

김형환 2023. 11. 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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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가습기살균제 제조사 손배 책임 인정
'3단계 피해자' 인정…추가 소송 잇따를 듯
“제조사가 살균제 외 다른 원인 규명해야”
5000명 넘는 피해자…위자료는 개별 산정

[이데일리 김형환 기자] 2011년 4월 서울아산병원에 원인불명의 급성 폐렴을 앓는 임산부 및 영유아 환자가 대거 입원했습니다. 당시 출산을 앞뒀던 산모들은 정확한 원인도 모른 채 숨지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질병관리본부는 원인미상의 폐 손상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것임을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자는 지난 7월 기준 총 5041명에 달합니다.

지난 8월 31일 서울역 앞 계단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12주기 캠페인 및 기자회견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의 유품이 놓여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12년이 지나도록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정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정된 피해자가 5000명이 넘는 상황에서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소 의아합니다. 그러던 중 지난 9일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첫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습니다. 12년 만에 나온 이번 손해배상 판결의 의미는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제조사 손해배상 책임 처음 인정한 대법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지난 9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김모씨가 제조·판매사인 옥시레킷벤키저(옥시)와 납품업체 한빛화학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에게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김씨는 2007년 1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던 인물로 2013년 5월부터 폐 질환에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김씨는 질병관리본부에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호소했지만 2014년 3월 3등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정부는 폐 질환을 호소하는 이들을 가습기 살균제와의 영향력을 고려해 1(가능성 거의 확실)부터 4(가능성 거의 없음)까지 나눠왔습니다. 김씨는 ‘가능성이 낮다’는 정도였기 때문에 정부와 제조사로부터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3·4단계로 판정받아 큰 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2020년 4월 기준 5083명에 달합니다. 이는 전체의 90%에 이르는 정도입니다.

이같은 상황 속 김씨는 제조사인 옥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본인과 가족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3000만원을 산정했습니다. 1심은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심은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제조사들이 김씨가 겪고 있는 건강적 문제가 다른 원인으로 발생한 것임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대법원 역시 2심의 이같은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2심이 이처럼 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간 가습기 살균제와 인체 간의 연관관계를 증명한 다양한 연구결과가 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2017년 통과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가습기 살균제 특별법)의 영향도 있습니다. 당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폭넓게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학계의 여러 연구결과가 나왔고 이에 국회는 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당시 굉장히 제한적으로 인정해주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범위가 넓어지게 됐습니다. 당시 아무런 피해보상을 받지 못했던 3·4단계 피해자들은 △가습기 살균제 노출과 건강 피해의 개연성 △시간적 선후관계 △지속성 등을 평가받아 피해를 인정받게 됐습니다. 김씨 역시 특별법으로 ‘노출확인자’가 됐습니다.

지난 8월 31일 서울역 앞 계단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12주기 캠페인 및 기자회견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의 유품이 놓여있다. (사진=연합뉴스)
대법 판결로 추가 손배 소송 잇따를 듯

이런 관점에서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김씨와 같이 피해를 인정받은 3·4단계 피해자들이 기업들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정일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의 판단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건강상의 피해를 입은 이에 대해 다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제조사가 증명하지 못한다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같은 대법원의 논리를 다른 피해자에도 적용하면 구제 범위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김씨가 사용했던 옥시 뿐만 아니라 다수의 가습기 피해자가 발생한 애경, SK케미칼(285130) 등 역시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는 게 이 변호사의 설명입니다. 이 변호사는 “옥시 제품을 썼든 애경 제품을 썼든 제조사가 ‘피해자들의 건강상 피해에는 흡연이든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이같은 이 변호사의 주장에 따르면 5000명의 넘는 피해자들의 소송이 잇따를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500만원이라는 금액 자체가 너무 작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이 변호사는 ‘금액’보다는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치료비는 이미 구제급여로 지급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 명의 개인에게 줘야 할 위자료가 500만원이라는 게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라며 “개별적으로 건강 피해 정도와 기간에 따라 피해 금액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가습기 피해자 1인당 받을 수 있는 최대 위자료가 500만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1821명. 환경단체 등이 산정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자입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5000명이 넘지만 여전히 일부 제조사들에 대한 형사처벌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 12년간의 싸움에 지친 피해자들에게 작은 힘이 되길 바랍니다.

김형환 (hwani@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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