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번 달겠습니다" 그 패기처럼, 안우진과 대등하던 그때처럼…야생마 후계자로 돌아왔다
[스포티비뉴스=수원, 신원철 기자] "47번 달고 싶습니다." LG 왼손투수 김윤식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등번호를 57번에서 47번으로 바꿨다. '감히' 지금까지 LG 투수들이 바라보기만 하던 번호를 스스로 선택했다.
47번. '야생마' 이상훈 해설위원이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다. 한동안 그 상징성 때문에 섣불리 다가서는 선수가 없었다. 봉중근이 2007년과 2008년 쓰다가, 이형종이 투수 시절이던 2009년 한 시즌 동안 달았다. 포수 조윤준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썼고 이후 이상훈 코치가 LG에 복귀하면서 다시 47번을 되찾았다.
이상훈 코치가 LG를 떠나게 되면서 47번은 다시 공석이 됐다. 마치 임시결번처럼 4년 동안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김윤식이 스스로 나섰다. 그는 지난 2월 구단 유튜브 영상에서 "(2022년)시즌 중후반 때 단장님께 47번을 달라고 했다. 이상훈 전 코치님께 가서 달아도 될지 여쭤보고 허락을 받았다. 입단할 때부터 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때는 김윤식의 주가가 올라가던 시기였다. 2022년 후반기의 인상적인 활약 덕분이다. 김윤식은 지난해 후반기 선발투수로 경기 운영에 눈을 뜨면서 완전히 급이 다른 투수가 됐다. 마지막 7경기 평균자책점이 단 0.85였다. 8월 20일 이후 리그 1위 기록이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비록 승리를 챙기지는 못했지만 MVP 후보이자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인 키움 안우진에 밀리지 않는 호투를 펼쳤다.
김윤식은 10월 27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5⅔이닝 3피안타 무4사구 3탈삼진 1실점을 기록했다. 안우진이 6이닝 6피안타 1볼넷 5탈삼진 2실점이었다. 선발 매치업에서 키움이 크게 앞서는 경기로 여겨졌고, 결과도 LG의 6-7 패배였지만 김윤식이 마운드를 지키는 동안만큼은 LG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후반기 활약상과 포스트시즌 호투는 김윤식을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국가대표로 만들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경험하는 국제대회를, 그것도 개막 직전에 열리는 대회를 준비하려다 보니 컨디션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WBC는 김윤식을 '스트라이크도 던지지 못하는 투수'로 보이게 만들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시즌 준비가 제대로 될리 없었다. 김윤식은 개막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으나 6월까지 11경기에서 3승 4패 평균자책점 5.29에 그친 채 1군에서 제외됐다. 몸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김윤식은 "WBC 경기에 (몸 만드는)일정을 맞추다 보니 평소 하던 것들을 할 수 없는 여건이어서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몸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갔다와서 시간을 두고 훈련을 하고 들어갔으면, 여름에 했던 서머캠프를 귀국 후에 곧바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핑계대고 싶지는 않지만 나중에 또 뽑힌다면 이 경험을 바탕으로 더 잘하고 싶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돌아봤다.
게다가 김윤식이 '서머캠프'에 들어간 사이 LG의 로테이션이 확 달라졌다. 최원태가 트레이드로 LG유니폼을 입었고, 이정용이 보직 전환에 성공했다. 염경엽 감독은 엔트리 확대 기간에도 김윤식과 이민호의 자리가 없을 수 있다는 말로 채찍을 들었다.
김윤식은 9월 복귀 후에도 지난해 후반기의 눈부신 투구를 재현하지 못했다. 9월 5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93에 3승을 거뒀지만 퀄리티스타트는 한 번도 없었다.
염경엽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김윤식을 유력한 선발카드로 거론하면서도 쉽게 확신을 내리지는 못했다. 플럿코가 부상으로 팀을 이탈한 상황에서도 이정용이 퀄리티스타트를 반복하며 로테이션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염경엽 감독은 고심 끝에 김윤식을 택했다. 정확히는 이정용의 쓰임새가 더 다양하다고 판단해 김윤식의 등판 기회를 4차전 선발 한 번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8일 2차전이 끝난 뒤에는 만약 10일 3차전을 내주면 벼랑 끝에 몰리지 않기 위해 케이시 켈리를 4차전 선발로 바꿀 생각까지 했다.
LG가 10일 3차전을 8-7 말도 안 되는 역전승으로 장식한 덕분에 4차전 선발은 김윤식이 됐다. 만회할 여유가 없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은 김윤식은 다시 '빅게임 피처'로 돌아왔다. 그동안 겪어본 적 없었을 추위와 시리즈 리드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5⅔이닝을 단 1실점으로 막고 승리투수가 됐다. LG의 이번 한국시리즈 첫 선발승이다.
김윤식은 "일단 무조건 오늘 던진다 생각했다. 안 되더라도 중간에서 한 두 경기라도 보여주면 되니까. 욕심은 있었지만 의식은 하지 않았다. 주어진 자리에서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며 "어제 이기기도 해서 편한 마음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또 체인지업과 커브의 감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자신을 도와준 임찬규를 떠올리며 "(3차전 선발이었던)찬규 형도 잘 던져서 마음이 편했다"고 덧붙였다. 예비 FA인 임찬규는 3차전 등판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김윤식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김윤식은 "개인적으로도 같이 하고 싶고, 선배 역시 팀에 필요한 선수라고 생각한다. 찬규 형 덕분에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야구 외적으로도 많은 것들을 배웠다. 감사하다"고 전했다.
김윤식은 "올 시즌 많이 힘들었다. 자리도 잘 못 잡았고 부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눈치 아닌 눈치도 봤다. 마지막이라도 팀에 승리가 필요할 때 기대에 보답해서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많이 아쉬운 시즌인데 그래도 한 부분에서는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선방은 한 것 같다"고 얘기했다.
한편 LG는 4차전에서 kt를 15-4로 대파하고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29년 만의 통합우승에 단 1승을 남겨뒀다. 5차전은 13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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