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인터뷰]이정홍 감독 "우연과 전화위복이 '괴인'이 됐다"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괴인'은 종잡을 수가 없다. 이 작품은 통념을 깬다. 관객 대부분에겐 무의식 중에 학습된 스토리가 있다. 익숙한 설정 몇 가지가 모이면 으레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이 예상되기 마련이다. 클리셰 말이다. 그저 그런 영화들은 이런 공식을 답습함으로써 관객을 심드렁하게 한다. 그런데 '괴인'은 관객이 움켜쥐려는 순간 매번 그 손길을 유유히 빠져나가며 러닝 타임 136분을 가뿐히 버텨낸다.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길고 주류 영화라고 해도 위험부담이 적지 않은 상영 시간인데도 '괴인'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슬아슬함으로, 알 것 같았는데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발생하는 긴장감으로 관객을 몰아간다. '괴인'에는 괴상한 괴력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괴인'이 진부함을 깨부수는 충격적인 사건을 줄지어 보여줄 것만 같지만, 사실 이 영화엔 아무 일도 없다. 당연히 줄거리랄 것도 없다. 이 작품이 그려가는 건 목수 일을 하는 기홍의 일상. 피아노 학원 인테리어 일을 끝내고, 이사를 가서 도시 외곽 주택에 세들어 살게 된 뒤, 주인집 남자와 어울려 술을 마시고, 종종 새로운 일을 구하며, 결혼한 동생 집에 들르기도 하고, 또 술을 마시는 모습을 담아내는 게 '괴인'의 전부다. 이 영화는 특기할 만한 사건을 펼쳐놓는 대신 특별할 게 없는 일상 속에 똬리를 틀고 앉은 관계에 골몰한다. 피아노 학원 원장과, 함께 일하는 친구와, 주인집 부부와, 차를 망가뜨린 어느 여성 등과 기홍 사이의 거리를 포착하려 한다.
이정홍(38) 감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엔 벽이 있고, 그 벽을 절대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이 감독은 "그 벽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공포감을 영화로 풀어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에게서 이 이상한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괴인'이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2012년에 단편 '반달곰'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편 부문 작품상을 받은 이후 장편을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달곰'과 '해운대'가 예상치 못한 호평을 받고 과분한 수상을 했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확신은 없었다. 원래 회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광고학과에 가게 됐고, 영상을 공부하게 된 뒤에 개인적인 성향이 담긴 단편을 만들었던 거다. '괴인' 만들기 전까지 직장에 다녔다."
-어떤 일을 했나.
"광고회사에 다녔다."
-단편에서 장편으로 나아가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
"사실 단편은 습작처럼 만든 영화였다. 그 이후 장편을 찍을 어떤 준비도 안 돼 있었고, 능력도 없었다. 내가 과연 영화를 해도 될까, 확신도 없었다. 물론 영화의 매력에 빠져 있었고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흔히 말하는 산업 안에서 한국영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없어 보였다. 작가주의적인 걸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먹고 사는 문제 역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장인으로 살면서 영화감독의 꿈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해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완성해서 내놓은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반응은 좀 찾아봤나.
"반응을 아예 안 본 건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 건 보신 분들이 이 영화를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영화를 준비하고 만들면서 내 영화가 갖춰야 할 게 무엇일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중 상위에 있던 게 다양성이었다. 한 방향으로 정리하기 어려운…그게 삶을 감각하는 중요한 무엇이라고 봤다. 선명하지 않을 때 오는 공포 같은 걸 영화에 담고 싶었다."
-말한대로 '괴인'은 선명한 게 하나도 없는 영화다. 캐릭터도 그렇고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 역시 모호하다. 다양한 인물들과 함께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
"이 이야기는 완성돼 간 과정이 특이하다. '괴인'은 애초에 목표했던 이야기가 시나리오가 된 게 아니다. 쓰다가 실패한 다른 시나리오들이 이 이야기로 합쳐졌달까. 가령 다른 시나리오의 주인공이었던 인물이 '괴인'의 등장 인물 중 한 명으로 합류하는 식이었다. 변태를 거쳤다고 해야 하나."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줄 수 있나.
"음…이 작품은 '기홍'에게서 시작된 건 아니다. 시작은 금발 머리 소녀 '하나'였다. 이 캐릭터는 우연히 매체를 통해서 본 어떤 인물이 모티브가 됐다. 당시에 나는 나를 고립한 채 살았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외로워 했다. 이런 내게 자괴감을 갖기도 했다. 그때 그 매체를 통해 본 그 인물이 내게 큰 열등감과 동시에 희망을 줬다. 타인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영감을 준 사람이다. 그렇게 이 영화가 시작됐다면 시작됐다. 기홍도 그렇다. 기홍은 이 인물을 연기한 오랜 친구인 박기홍이 모티브가 됐다(기홍은 박기홍 배우가 연기했다). 오랜 친구이지만 이 친구에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그를 더 관찰해보고 싶고 더 알아보고 싶었다."
-이 말을 들으니까 '괴인'은 당신이 만든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자연발생적인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의도나 목적을 분명히 세우고 시작한 게 아니다. 마치 미로 속을 헤매듯이 무엇을 이야기할지 명확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두려움을 바라보면서, 내게 영감을 준 인물·사건·공간 등을 통해 완성됐다."
-'괴인'이라는 제목이 우선 강렬하다. 어떻게 나온 제목인가. 자주 쓰지 않는 말이면서 동시에 아주 낯선 단어는 아니다.
"원래 가제였다. 다른 제목도 찾아봤는데 결국 못 찾았다. 편집을 하다 보니까 이 제목이 영화와 어울리더라. 말한 것처럼 괴인이라는 단어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말이다. 호감과 비호감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게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잘 맞았다. 그리고 이 단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누군가를 괴인으로 보는 건 상당히 과장된 것이지만, 그 태도 자체가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필요 이상으로 불편해하고 어려워하고. 명쾌하지 않은 단어인데, 이 영화가 명쾌하지 않아서 괜찮더라."
-말한대로 '괴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괴인처럼 보이긴 한다. 그 중에서도 집주인 '정환'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께름칙한 사람이랄까. 우울하고 무기력하면서 동시에 쾌활하기도 하다. 친절하지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음…캐릭터 역시 아까 말했던 것처럼 변태 과정을 거쳤다. 정환도 그렇다. 원래 정환은 더 우울하고, 집에서 놀고 먹고, 와이프를 짝사랑하고, 영화보다 더 연령대가 높고, 기홍을 애정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안주민 배우를 만나게 된 뒤 캐릭터가 조금 바뀌었다(안주민 배우는 전문 배우가 아닌 요리사다). 이 분은 체격도 좋고 겉으로 보면 화려하고 참 매력적인 분이었다. 그런데 만나다 보니까 어떨 때는 사납게 보이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안주민 배우의 실제 모습이 이 캐릭터 안으로 들어왔던 거다. 내가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겪은 일들, 어떤 만남들이 우연히 이 영화에 끼어들고, 해체되고, 재조립되는 과정이 있었다."
-기홍·정환·하나 등 주요 인물 모두 배우가 아닌 이들이 연기했다. 장편 데뷔작에서 전문 배우가 아닌 이들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게 위험 부담이 있지 않나. 왜 이런 선택을 했나.
"위험 부담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웃음)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을 했다.(웃음)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겠다고 정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전문 배우들을 섭외하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일단 친구 기홍이 기홍 역을 맡기로 하고 나서는 다른 배역은 전문 배우에게 줘서 밸런스를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괴인'은 비전문 배우가 연기를 함으로써 오히려 현실감을 더 산다. 관객이 이 작품을 더 낯설게 느끼게 한다는 얘기다. 배우를 섭외하지 못한 게 득이 됐다고 해야 할까. 당신 말을 들어보면 이 작품 완성까지 우연이 꽤 많이 작용했다. 창작에 있어서 우연이라는 건 뭐라고 해야 할까.
"모든 걸 내 계획대로 해본 경험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완전히 내 계획대로 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을 짐작하긴 어렵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성취감이 있다는 것이다.(웃음) 영화는 개인 작업이 아니다. 감독으로서 내가 리드를 하는 건 맞지만 결국 외부의 많은 요소, 다른 사람들이 개입해 만들어진다. 내가 내 계획을 이루는 데 너무 포커스를 두면 괴로워진다. 이 우연들 속에서 나름의 창의성을 발휘해서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전화위복의 감각, 그 아슬아슬한 경험이 아주 진하게 남았다. 그래도 다음 영화를 만들 때는 더 체계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다.(웃음) 계획대로 했을 때 내 영화가 더 좋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외면하진 못한다."
-긴 러닝 타임은 이 영화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보통 독립영화는 길어도 2시간을 넘지 않는다. 보통 90~100분 정도다. 그런데 '괴인'은 2시간16분이나 된다. 이건 상업영화도 부담스러워 하는 러닝 타임이다. 의도가 있었나.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처음에 싱크 맞추는 작업을 하면서 보니까 100분이 안 될 것 같더라. 영화 안에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웃음) 영화 하는 친구들 만나서도 러닝 타임이 100분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편집을 다 해놓고 보니까 136분이더라."
-제작하는 쪽에서 러닝 타임을 줄여달라고 하지는 않았나.
"있었다. 줄이려면 충분히 줄일 수 있지 않냐고 하더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를 줄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웃음) 여유 있는 감각으로 편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난 광고회사를 다녔다. 그 관성 때문에 낭비 없는 편집이 버릇이 돼 있다. 모든 신(scene)을 타이트하게 편집했다고 판단했다."
-영상 길이가 점점 더 짧아져 이제는 사람들이 30초 짜리 영상을 주로 보는 시대가 아닌가.
"맞다. 내가 걱정하는 건 이것이다. '괴인'을 극장에서 볼 땐 러닝 타임이 큰 문제가 안 될 거라고 본다. 다만 이제는 영화를 극장에서만 보는 시대는 아니지 않나. 극장 상영이 끝나면 집에서 보게 될 텐데, 집에서 보는 관객이 이 러닝 타임을 견뎌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음 영화를 만들 땐 그런 부분까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작품의 큰 테마라고 한다면 인간 관계일 것이다. 모든 관계엔 긴장감이 있기 마련이고 어떤 순간에는 아슬아슬한 선을 오가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이런 느낌을 실감하게 한다. 이런 주제를 택한 건 감독 개인의 경험이 강하게 반영된 거라고 봐도 되나.
"개인적인 경험이 아주 직접적으로 들어가 있진 않다. 물론 가족과 대화하기 어려워 한다는 건 내 얘기일 것이다. 부모님과 도대체 언제 대화를 나눠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어쨌든 이 시나리오를 쓸 때 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 관계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벽이 있고, 그 벽을 절대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20대 때는 그런 자각이 더 심했다. 늘 벽을 확인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그 공포에 관해 얘기하고 생각해보고 싶었다."
-사람을 믿지 못 한다고 해야 할까.
"믿음의 문제라기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다. 난 언제 어디에서나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내 안의 욕망을 다 드러내지도 못한다. 소통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나만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 약간의 회의적인 시각이 있는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소통이 어려운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이 내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건 맞지만, 아주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충분히 동시대성을 갖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 나오는 각 에피소드는 다른 영화와 비교할 때 매우 평범하다. 하지만 또 아주 일상적이지는 않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상하게 됐나.
"내 나름대로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만든 거다.(웃음) 사실 나는 아주 특별해 보이는 것에 흥미가 덜하다. 볼수록 이상한 것,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좀 특별한 것을 찾고 싶었다. 예를 들어 차가 파손되는 사건은 흔하다. 하지만 지붕이 망가지는 건 애매하지 않나. 겉으로는 티도 안 나고, 고쳐야 할지 그냥 타야 할지 판단도 안 된다. 내 영화가 전체적으로 이런 느낌을 주길 원했다. 평범한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평범하지 않길 바랐다. 다르덴 형제 감독 영화를 좋아한다. 그들의 영화도 그렇다. 물론 내 영화를 다르덴 형제 감독 영화와 비교하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말하자면 일상에 가깝지만 영화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다르덴 형제 감독 영화는 어떤 걸 좋아하나.
"그때 그때 다르다. 다 좋기도 하고. 처음 내게 충격을 준 작품은 '로제타'였다. 그리고 '로나의 침묵'의 로나 캐릭터를 좋아한다. 캐릭터로서 내게 큰 충격과 영감을 줬다. 생각해보면 '괴인' 속 하나는 로나의 영향을 받았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 계획인가. '괴인'에 가까운 작품인가 아니면 그래도 상업성을 더 갖고 있는 영화인가.
"일단 '괴인' 촬영 마무리 단계 때부터 생각하기 시작해서 써둔 이야기가 있다. 이걸 진행해보고 싶다. 둘 중 어느 쪽이냐고 하면 '괴인'에 더 가까운 쪽이다."
-주류상업영화 쪽으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과정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당장 마음 먹는다고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날 더 발전시키고 버전업을 해야 하고, 그러면서 영화 언어에 대한 장악력을 갖게 돼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샌 영화감독들이 시리즈물도 연출하지 않나. 그런 쪽에 관심은 없나.
"내가 감히 하고 싶다 하기 싫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웃음) 난 늘 영화라는 게 무엇인지 그 질문을 안고 살아왔다. 내게 영화는 언제나 극장에서 보는 것이었지만, 이젠 시대가 바뀌었다. 나도 그런 시대 변화에 발맞춰가야 한다고 본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면서 중간에 쉼표 같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면 그게 시리즈물이 되는 것인지 생각해본 적도 있다. 결국 내게도 시리즈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거다.(웃음) 어쨌든 어느 하나만 하겠다고 선을 그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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