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짚의 재발견] 가을걷이가 끝나고…들녘에 누워있던 볏짚, 농촌의 예술로 일어섰네
전북 장수누리파크에 우뚝 선 조형물 눈길
귀촌 10년 배철호 작가 지역재생 위해 기획
주민들 추억 떠올리며 새끼 꼬는 작업 참여
“농촌감성 제대로네” 체험프로그램도 인기
“작품 위에 흰눈 내려앉은 풍경도 기대돼요”
식물 줄기를 이용해 물건을 만드는 것을 초경공예라고 한다. 볏짚공예가 대표적이다. 과거엔 주로 쓸모 있는 세간을 만들었다면 요즘은 주로 장식품을 만드는 추세다. 최근엔 대형 조형물로 제작해 색다른 볼거리가 되기도 한다.
9월 전북 장수누리파크에 특별한 조형물이 들어섰다. 볏짚으로 만든 소와 닭·부엉이다. 시골 정취가 듬뿍 담긴 재료로 만들어서일까. 거대하고 낯선 모습이 생경할 법도 하지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압도감보다는 푸근함과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번 전시는 배철호 작가가 기획했다. 장수에 귀촌한 지 10년차로 지역에 어울리는 재밌는 전시가 없을까 고민하다 볏짚공예를 떠올렸다.
“처음 귀촌했을 때 동네 초등학교 전교생이 100명 정도였어요. 딸아이가 입학하려고 보니 50명이었고요. 그 뒤로 계속 학생이 줄어 둘째가 학교 갈 때면 폐교되겠더군요. 지방소멸이 심각하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장수를 알리고 사람들이 찾아오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농촌이란 정체성이 담긴 행사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배 작가는 산서면에 산다. 장수에서 쌀농사가 가장 활발히 이뤄지는 곳이다. 동네가 온통 논이다. 추수가 끝나면 볏짚이 산더미처럼 쌓인 논이 숱하다. 농촌 감성을 드러내는 재료로, 흔하디 흔한 볏짚만큼 좋은 것이 없다.
전통적인 볏짚공예는 주로 크기가 작은 생활소품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조형물은 최대 폭 4m, 높이 8m 크기다. 배 작가가 총괄 감독을 맡았고 개별 작품은 남원 등 인근에서 온 작가들이 협업해 제작했다.
조형물을 만들려면 우선 뼈대를 세워야 한다. 각목이나 철골로 기초 구조를 만들고 거기에 볏짚으로 엮은 이엉을 두른다. 소뿔이나 닭 부리, 부엉이 눈처럼 포인트가 되는 부위는 새끼줄로 표현한다. 몸통에 가는 새끼줄을 묶어 무늬를 표현하기도 한다. 똑같은 짚이라도 새끼줄을 꼬거나 묶는 방법을 달리하면 질감이 다채로워진다.
작가만 품을 들인 것은 아니다. 지역주민도 손을 보탰다. 특히 새끼줄은 산서면 어르신들 솜씨로 나왔다. 지역자원이라는 것이 꼭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배 작가는 장수 주민들의 삶에 녹아 있는 문화와 기술도 자원이라고 봤다.
“마을 어르신들은 어렸을 때 집에서 손수 새끼를 꼬아 물건을 만들어 쓰셨대요. 지금은 쓸 일이 없으니 방법을 다 잊어버리셨죠. 그걸 되살리고 싶어서 ‘새끼 꼬기 대회’를 열었어요. 다들 기억을 더듬어 대회에 참가하셨죠. 어르신들이 꼰 새끼줄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볏짚공예는 마을 주민이 다 함께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농사가 기계화되면서 요즘 농촌에서도 여럿이 힘을 합쳐 하는 일이 별로 없다. 배 작가는 볏짚공예를 하는 동안 마을 주민들이 하나가 된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볼거리를 만들었다는 자부심도 크다. 무엇보다 전시 기간 중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관심이 뜨거워 볏짚공예가 관광자원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봤다.
“사흘간 열린 프로그램에 200명 넘게 참여했습니다. 색달라 좋았다면서 기회가 있다면 또 와보고 싶다는 문의가 많았어요. 친환경재료라서 아이들이 안심하고 만지고 놀 수 있어서 요즘에 딱 맞는 체험입니다.”
전시는 2024년 3월까지 이어진다. 배 작가는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레 짚 색이 바래는데 그 모습이 볼 만하다”면서 “눈이 내려앉은 풍경도 근사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최근 볏짚공예가 농촌의 감성과 매력을 드러내는 예술로 주목받으면서 곳곳에서 관련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경기 김포시 하성면 논에선 대형 볏짚 개구리가 전시 중이다. 곤포 사일리지는 눈·코·입을 붙여 꾸몄다. 작은 아이디어를 더하자 평범한 물건이 재밌는 볼거리가 됐다. 관광객을 유치할 만큼 거창하진 않지만 지역민 일상을 즐겁게 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크다.
일본에선 볏짚공예가 일찌감치 농촌 관광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니가타현에서 2006년부터 매해 8∼10월 마을 논에 볏짚으로 만든 다양한 조형물을 전시하는 ‘와라페스티벌’이 열린다. 와라는 일본어로 ‘볏짚’을 뜻한다. 전형적인 농촌이던 곳은 축제 덕분에 이색 관광도시로 자리매김했고 축제 기간이면 해외에서도 관광객이 몰린다. 지역경제까지 덩달아 살아나면서 지금은 일본 전역에서 이뤄지는 대표적인 문화행사가 됐다.
볏짚공예는 색다른 경험과 여행을 찾는 도시민에게 잘 어울리는 선택지다. 볏짚은 쌀농사가 이뤄지는 곳에서 자연히 생기는 부산물이니 재료 수급에도 걱정이 없다. 잘만 하면 농가의 쏠쏠한 수입원이 될 수도 있다. 배 작가는 “볏짚공예는 농촌지역에 활기를 더해줄 자원”이라면서 “내년에는 실제 논 위에 작품을 전시하고 이듬해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할 때 같이 태우면서 액운을 날리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