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청조 사건' 이제부터 진짜 중요한 이유[이승환의 노캡]

이승환 기자 2023. 11.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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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본 '전청조 사태'

[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재벌 3세'를 사칭하며 사기 행각을 벌인 혐의로 구속된 전청조씨(27)가 10일 서울 송파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2023.11.10/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2015년 개봉한 '스포트라이트'는 기자들의 피를 끓게 하는 영화다. 미국 3대 일간지인 보스턴 글로브 내 탐사보도팀(스포트라이트팀) 기자들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다. 이들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교회 내부에서 조직적으로 은폐했던 사제들의 아동 성범죄를 추적해 폭로한다. 성범죄 의혹 신부만 최소 90명이었다. 허구가 아닌 실화가 바탕이 된 영화다.

◇"시스템 고발해야 종지부 찍을 수 있다"

영화에는 명장면과 명대사가 가득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저돌적인 성향의 기자 마이클 레젠데스와 팀장인 윌터 로빈슨이 보도 여부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모습이다.

마크 러펄러가 분한 레젠데스는 '윗선'인 추기경의 범죄 은폐 단서를 입수한 직후였다. 레젠데스는 빨리 보도하자고 팀장을 재촉한다. 급기야 "지금 기사를 내지 않는다면 다른 언론사에서 먼저 쓸 것이다"고 흥분한다.(이 대목에서 많은 기자가 공감하는 바가 클 것이다.)

중요한 장면은 그다음에 나온다. 로빈슨은 씩씩대는 레젠데스에게 단호하게 말하며 추가 취재를 지시한다. "(신부 개인 아닌) 시스템을 고발해야 한다. 종지부를 찍을 방법은 그것뿐이야."

더 많은 사제의 성추행 의혹을 파악해 이를 가능하도록 한 시스템을 고발하자는 것이다. 취재를 총괄 지휘하는 편집국장 마틴 배런도 앞서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신부 개개인이 아니라 교회에 집중해야 해. 관행과 정책 같은 것 말이야."

일부 개인의 일탈이 아닌 시스템이 마침내 규명해야 하는 진상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시스템이란 무엇일까? 교회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나 정책, 부조리한 관행, 윗선의 조직적인 은폐 정황일 것이다.

이런 취재 목표와 사명감이라면 결과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실제 스포트라이트팀 기자들은 2002년 1월부터 12월까지 총 19차례에 걸쳐 사제들의 성범죄 의혹을 연속 보도한다. 이듬해 이들은 미국 언론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퓰리처상 분야 중 대상 격인 공공보도 부문을 수상한다.

그러나 언론계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포트라이트팀의 열정과 다소 다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퓰리처상 수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보스턴 글로브는 이후 재정난으로 폐간 위기에 내몰려 2013년 헐값에 팔린다. 좋은 보도가 언론사의 수익 구조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현실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개인'에 집중하는 보도가 두드러진다. 국내외 할 것 없이 독자는 시스템이 아닌 개인을 다루는 보도를 더 선호하고 즐긴다. 지금 당장 그런 기사를 찾을 수 있다. 전국적인 이슈로 확산한 '전청조(27) 사기 사건' 보도가 대표적이다. 전씨의 투자사기를 가능하게 한 제도적 빈틈보다 재벌 3세를 사칭한 그의 능수능란한 말솜씨와 성 정체성에 초점을 맞췄다.

◇'전청조' 만든 시스템 규명됐을까 전씨의 재혼상대였던 펜싱 국가대표 출신의 남현희씨까지, 해당 사건에는 가독성을 증폭하는 흥미로운 요소가 상당하다. 술자리에서도, 커피숍에서도, 회사에서도 온통 '전청조'와 '남현희' 얘기였다. 언론이라면 대중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한다.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전청조 개인'에 대한 보도가 무조건 잘못됐다고, 선정적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다만 전청조라는 희대의 사기극을 만든 '시스템'이 제대로 규명됐는지는 다른 문제다. 우리는 그 시스템을 인지하고 있는가? 대중들도, 기자들도, 관련 정책 담당자들도 확답할 수 없을 것이다.

전청조 사건의 본질은 허점투성인 제도와 솜방망이 처벌, 보이는 것에 매몰된 사회 풍토다. 이 때문에 평범한 직장인들이 전씨가 파놓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스템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개선하지 않는다면 '제2의 전청조'가 나오는 것을 막기 힘들 것이다.

보스턴 글로브 편집국장 배런은 보도를 앞두고 신경이 곤두선 스포트라이트팀에 중저음으로 말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지요. 갑자기 불이 켜지면 탓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이죠." 전청조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불이 들어온 이 순간 곳곳에서 사각지대가 드러나고 있다. 진짜 중요한 취재는 이제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이승환 사건팀장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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