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짚의 재발견] 화르르 타올라 미식의 세계로 안내하다
고기, 최고 1000℃ 달하는 화력으로 초벌
육즙 갇혀 ‘촉촉’ 구수한 향 스며 ‘풍미’ 배가
낙지 호롱구이·짚불 곰장어도 대표적 음식
청국장·메주 만들때 발효에 도움되는 재료
쌀알을 모두 털어낸 볏짚은 앙상하고 볼품없어 보인다. 하지만 ‘쓸모없으니 곧 버려지겠군’ 하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조상들은 볏짚으로 지붕을 엮거나 짚신을 만드는 지혜를 발휘했다. 볏짚은 지금도 우리들의 생활 곳곳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공예를 선보여 마을을 꾸미기도 하고 요리에 활용해 특유의 향으로 음식의 품격을 높이기도 한다. 무궁무진한 볏짚의 변신을 소개한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마당에 짚불을 피워 주위에 둘러앉아 놀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 불로 고기·생선·고구마를 구우며 향긋한 볏짚향을 음미하고 귓가에 맴도는 타닥타닥 지푸라기 타는 소리를 들으며 불멍을 하기도 한다. 최근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 사이에서도 레트로(Retro·복고)가 유행하며 볏짚 구이·발효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구수한 향 풍기는 볏짚구이
짚불의 장점은 순간적으로 높은 온도를 찍는 화력과 특유의 향이다. 활활 타오르는 볏짚은 최고 1000℃에 도달할 정도로 화력이 세다. 은은하게 고기를 구워 육질을 부드럽게 해주는 숯과는 다른 매력이다. 짚불에 고기를 초벌하면 안에 육즙이 갇혀 촉촉하고 부드러워진다. 짚불에서 나는 구수한 향이 고기에 배어드는 건 덤이다. 훈연향은 잡내를 없애고 풍미를 한층 높여준다.
20년 넘게 볏짚구이 요리법을 고집하고 있는 서울 강동구 ‘김수환식당’을 찾았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통유리 주방에서 펼쳐지는 불쇼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방장이 두 손 가득 볏짚을 꺼내 아궁이에 올린다. 토치로 볏짚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더미 전체에 불이 옮겨붙으며 화르르 타오른다. 불기둥이 천장을 뚫을 듯이 치솟자 주방장이 기다렸다는 듯 고기를 올린 석쇠를 들이댄다. 볏짚이 1분 만에 모조리 재가 돼버렸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미 고기는 알맞게 초벌돼 손님상에 나갈 준비를 마쳤다.
식당을 운영하는 김철근 대표(49)는 “향은 기름에 잘 스며들기 때문에 기름기 많은 부위가 볏짚구이에 알맞다”며 “우대갈비나 삼겹살이 가장 맛있고 항정살·살치살도 볏짚에 구워 먹기 좋다”고 설명했다.
초벌돼 나온 고기는 불판에 마저 익혀 소금을 콕 찍어 먹으면 된다. 고기를 입에 넣자 은은한 짚불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씹을수록 갇혀 있던 육즙이 흘러나와 훈연향과 어우러진다. 김 대표는 “볏짚에 물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뿌연 연기가 나니 바싹 말려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며 “볏짚 사이에 공기가 잘 통하게끔 성기게 모양을 잡고 불을 붙이는 것이 기술”이라고 귀띔했다.
짚불로 맛을 낸 해산물
볏짚으로 구워 먹는 또 다른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낙지와 곰장어다. ‘낙지 호롱구이’가 향으로 미식가들을 매혹한다면 ‘짚불 곰장어’는 볏짚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요리다.
낙지 호롱구이는 세발낙지를 머리까지 통째로 볏짚 묶음에 돌돌 감은 다음 양념을 발라 짚불에 구워 만든다. 전남 영암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으로 ‘호롱’은 이곳 사투리로 볏짚을 뜻해 낙지 호롱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낙지가 마른 볏짚을 품은 데다가 짚불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비린내가 싹 사라질 수밖에 없다. 쫄깃한 식감은 살리고 은은한 볏짚향을 덧입힌 별미다.
짚불 곰장어는 볏짚으로 피운 불에 곰장어를 구워 먹는 음식이다. 부산 기장군 앞바다에 가면 꼭 먹어야 할 ‘먹킷리스트(먹다+버킷리스트·꼭 먹어야 하는 음식)’로 꼽힌다. 강한 불에 곰장어 껍질이 새까맣게 타버리는데 이를 벗기면 새하얗고 단단한 속살이 나온다. 기름기가 적고 쫄깃해 일품이다.
볏짚 엮어 발효시킨 별미
볏짚은 구이뿐만 아니라 청국장·낫토·메주 등을 만들 때도 없어서는 안될 재료다. 볏짚에 있는 바실러스균이 콩을 발효시켜 쿰쿰하고 깊은맛을 낸다. 이들 음식은 맛은 물론이고 건강에도 효과가 탁월하다. 몸에 이로운 미생물이 풍부해 변비 해소, 콜레스테롤 제거, 피부 개선에 좋다.
청국장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선 ‘볏짚 이불’이 필요하다. 삶은 콩을 담은 질그릇을 볏짚으로 덮어주고 2∼3일 따뜻한 방에 두면 청국장이 완성된다. 콩알 사이사이 실처럼 생긴 점액이 늘어나면 잘 발효된 것.
일본의 낫토도 청국장과 비슷하다. 단 한가지 다른 점이라면 청국장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균들이 복합적으로 발효를 일으키지만 낫토는 바실러스 단일 균만으로 발효시킨다는 것. 사탕 포장처럼 볏짚단 양 끝을 묶은 다음 중간에 삶은 콩을 넣고 발효시켜 다른 균과 접촉하지 못하게 한다. 청국장과 맛·향이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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