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총리 선수치고 미국부통령 통수치고…‘룰메이커’ 노리는 이 산업 [지식人 지식in]

이진명 기자(lee.jinmyung@mk.co.kr) 2023. 11. 11.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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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 수낵 vs 카멀라 해리스의 긴장된 밀당

영국 런던 북서쪽 80km 떨어진 곳에 블렛츨리파크라는 곳이 있습니다. 런던에서 차로 1시간여를 달리는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블렛츨리파크는 2차 세계대전 시기 정부 암호학교가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나치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 대규모 피해를 막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유명합니다. 최근에는 ‘블렛츨리써클’이라는 제목의 넷플릭스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곳에서 11월1~2일 이틀간 AI안전 정상회의가 열렸습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주관한 회의였는데요, AI가 발달하면서 앞으로 인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미리미리 AI안전을 위해 세계 각국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의 회의입니다.

영국 총리와 미국 부통령의 신경전
이 회의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바로 회의를 주창한 수낵 총리와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었습니다. 오늘은 회의를 전후해서 보여준 수낵 총리와 해리스 부통령의 팽팽한 신경전, 긴장감 높은 밀당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왼쪽)와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해리스 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해리스 부통령이 연설한 연단은 미국 대통령의 문장이 붙어 있을 정도였으니, 명실상부하게 미국을 대표해서 나온 셈이지요. 회의 주제는 앞서 밝혔다시피 인류를 AI의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국제사회가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수낵 총리와 해리스 부통령, 다시 말하면 영국과 미국의 견제가 치열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이 경쟁한 대목은 AI규제의 주도권을 누가 쥐는가 하는 것입니다. AI규제와 관련해 일종의 ‘룰 메이커’가 되겠다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국제사회에서 룰 메이커가 된다는 것은 해당 산업의 주도권을 쥔다는 의미입니다. 자국의 이익과 자국 기업의 이익에 유리하도록 국제표준과 국제사회의 규범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유럽이, 근래에는 미국이 모든 산업의 룰 메이커가 되면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했지요.

미국과 영국의 AI 룰메이커 경쟁
이번 승부에서는 영국이 선수를 쳤습니다. 수낵 총리는 지난 6월 미·영 정상회담을 불과 며칠 앞두고 글로벌AI정상회의를 영국이 개최하겠다는 계획을 기습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 영미 정상회담을 하면서 “영국과 미국은 세계 최고의 민주적 AI강국”이라며 “AI안전을 위해 국제사회와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이 뒤통수를 맞은 격입니다. AI분야에서 미국 기업이 압도적으로 앞서나가고 있지만, 영국이 AI규제의 주도권을 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도 절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다음 달인 7월 오픈AI와 구글 등 주요 IT기업으로부터 AI모델이 공개되기 전에 안전 여부를 테스트하겠다는 자발적 약속을 받아냈다면서 관련 행정조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영국에 선수를 빼앗긴 후 이를 부랴부랴 이를 뒤쫓는 형국이었지요. 하지만 미국의 추격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 AI안전 정상회의가 개막되기 이틀을 앞두고 미국은 AI규제 행정명령을 전격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행정명령은 AI의 잠재력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 각종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광범위한 규제를 담고 있었습니다. 행정명령 서명식에 해리스 부통령이 등장합니다. 해리스 부통령은 단호하게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가 미국 내에서 취하고 있는 조치가 국제적 조치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또 “동맹국 및 파트너들과 협력하여 세계 질서와 안정을 촉진하고 필요한 경우 추가 규칙과 규범에 대한 지지를 구축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AI에 관한 한 미국은 글로벌 리더”라며 “AI 혁신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것은 미국 기업이다. 다른 어떤 나라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글로벌 행동을 촉진하고 글로벌 합의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미국 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결코 영국에 AI규제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했습니다. 미국 언론들도 일제히 나서서 이번 행정명령이 AI에 대한 미국의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더 큰 고민…AI규제 힘조절
미국과 영국의 고민은 단순히 AI규제 주도권을 쥐는 것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훨씬 더 복잡한 다항방정식이 있습니다. 룰 메이커가 되어 전 세계 AI규제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좋지만, 자칫 과도한 규제가 자국 AI산업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 조절이 중요한 대목이지요. 더구나 AI규제 주도권을 잡으려 규제에 집착하다가는 자국 AI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은 물론이고, 국제사회로부터 외면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려는 당장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AI규제 행정명령이 발표되자 IT업계에서는 곧바로 항의의 뜻을 표시했습니다. 당연히 야당인 공화당에서도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공화당 소속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현재 미국의 가장 혁신적 기술 중 하나인 AI분야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후퇴했음을 의미한다”며 “혁신을 저해하고 AI기술 활용에 관한 의미있는 의회 논의를 가로막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역시 공화당 소속의 하원 에너지·상업위원회 캐시 맥모리스 로저스 위원장은 성명을 내고 “미래에 미국이 중국을 이기기를 바란다. 하지만 일방적이고 일률적인 규제로는 이를 실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AI안전 정상회의
이런 고민은 미국 뿐만이 아닙니다. 영국도 마찬가지 딜레마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수낵 영국 총리도 한발 물러섰습니다. 수낵 총리는 AI규제와 관련해 인류 멸망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에만 대비하는 수준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AI가 대량살상을 가능케 하는 화학무기 제조와 아동에 대한 성적학대 자료 유포에 악용되는 것만 규제 대상으로 제한했습니다. 이를 두고 영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수낵 총리가 중국과 미국을 따라잡고 AI강국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기술 규제에 소극적인 접근을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고위험 알고리즘에 경고딱지를 붙이고, 위반할 경우 큰 처벌을 내리려는 여타 EU 국가의 접근방식에 비해 상당히 소극적인 것이 사실이구요.

다행히 이번 AI안전 회의에서는 영국과 미국 중국 EU 등 24개 국가가 ‘블렛츨리선언’이라는 이름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영상으로 회의에 참석해 AI안전을 위한 규제 필요성에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가짜뉴스와 허위정보가 치명적인 피해에 이르기 전에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는 정책을 수립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또 이를 위한 안전한 AI모델 발전을 위한 연구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어쨌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는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각국 정부의 규제 속도보다 AI 발전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른 것 같습니다. 오픈AI CEO인 샘 알트만은 정부가 미래의 고급 AI 모델을 다루기 위해 새로운 규제 기관이 필요하다고 제안했지만 회사는 점점 더 발전된 AI시스템을 출시하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AI 개발 중단을 촉구하는 서한에 서명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AI 회사인 xAI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다음 AI안전 회의는 내년 5월 한국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11월에 프랑스에서 3차 회의가 열립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유엔총회 연설 등에서 AI이니셔티브를 수차례 강조한 바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이 국제사회의 AI 관련 규범 제정에 얼마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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