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하면 떠오르는 브랜드는 어디?…원조는 ‘여기’라는데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3. 11. 1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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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30][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25] 리바이 스트라우스

주말 외출에 나서기 직전, 옷장에서 이 옷 저 옷 뒤적거리며 고민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날씨에 따라, 외출 목적에 따라 어떻게 스타일링을 하고 어떻게 꾸며야할지 정해야 하는데요. 뾰족한 정답을 찾지 못해 망설이다 보면 가장 먼저, 그리고 손 쉽게 고를 수 있는 아이템이 있죠. 바로 청바지입니다. 일단 청바지를 걸쳐 입고 그에 맞추다 보면 어느새 패션을 완성하는데요.

오늘은 이처럼 옷을 입을 때 만능 소스 역할을 해내는 아이템, 청바지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즐겨 입는 일상복이자 작업복, 그리고 패션 아이템이 된 청바지. 그 청바지를 대표하는 기업, 어디가 떠오르시나요.

리바이 스트라우스
대일밴드가 반창고의 대명사인 것처럼 청바지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기업, 바로 리바이스인데요. 특히 2023년은 리바이스가 탄생한 지 170주년이자 대표 모델인 501 청바지 출시 1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리바이스를 창업한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브랜드로 남은 창업가들’의 25번째 주인공입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는 1829년 독일 바이에른 왕국 부텐하임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입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당시 유럽 및 독일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던 리바이는 16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면서 더욱 힘든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리바이스 로고
이에 리바이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했고 아버지 사망 2년 후 어미니와 함께 미국 뉴욕에 도착합니다. 그에게는 2명의 형이 있었는데요. 형 조나스와 루이스 스트라우스는 이미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맨해튼에서 ‘J. Strauss Brother& Co.’라는 가게를 차려 직물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리바이는 형들의 가게에서 천막 천을 만들고 담요, 재봉 용품 등을 배달하는 허드렛일을 하며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여동생 패니 부부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하자, 리바이 역시 그곳으로 기반을 옮기며 형들의 직물들을 떼다 그 곳에서 파는 중개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직물을 제작해 판매하는 가족사업이 뉴욕에서, 세인트루이스로 확장해나가던 그때, 리바이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로 서부개척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초창기 리바이스 매장
그가 막 미국에 도착한 1850년대는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미국에 터전을 잡은 이주민들은 금광을 찾아 서부 개발을 주도했고 너나 할 것 없이 캘리포니아로 향했습니다. 리바이 역시 2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떠난 서부지역에 사업 확장의 기회가 있을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리바이는 1854년 3월 기선을 타고 파나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Levi Strauss& Co.’라는 가게를 내며 자신의 이름을 건 가게를 엽니다. 그는 형들로부터 텐트 천, 지갑, 빗, 손수건 등 물건을 떼다 팔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채굴을 위한 금광에서 천막 텐트가 필요했고 이를 납품하며 사업도 제법 잘 됐습니다.
데님 소재의 오버롤 작업복을 입은 광부들
당시 금광에서 일하는 인부들에게 한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거친 일로 인해서 작업복 등이 쉽게 닳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들은 리바이는 튼튼한 천막 천을 이용해 작업복을 만들겠단 아이디어를 냈고 그렇게 청바지를 만들어 팔기 시작합니다.

사실 여기에도 행운의 여신이 그를 도왔습니다. 바쁘게 사업을 펼쳐가던 리바이는 그만 실수로 주문을 잘못해 파란색 텐트용 직물을 많이 생산하게 됩니다. 잉여재고로 처치 불가했던 파란색 천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던 그가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작업복을 만들자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우연히 근처 술집에서 광부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그는 이를 놓치지 않고 사업 아이템으로 확장한 셈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청바지 자체는 리바이스가 최초는 아닙니다. 리바이스 이전에 청바지를 만들었단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리바이와 데이비스가 함께 낸 리벳 특허
그렇다면 왜 리바이스를 청바지의 시조로 부르는 걸까요. 리바이스가 가지고 있는 ‘최초’ 타이틀은 사실 리벳입니다. 현재 리바이스의 상징과도 같은 구리재질의 리벳은 잘 닳고 해지는 천의 이음새 부분, 특히 주머니 쪽에 리벳을 박아 이를 방지하는 특허상품입니다. 여기에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사실 리바이의 고객 중에 재단사인 제이콥 데이비스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을 하던 중 유대인 출신의 데이비스는 리벳을 바지에 부착하는 특허를 고안했지만 특허를 낼 돈이 없어 고민을 하고 있었죠.
청바지에 부착된 리벳
이러한 고민을 직물 공급업자인 리바이에 털어놓자 리바이는 고심끝에 함께 특허를 내고 함께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1873년 리벳이 부착된 청바지가 탄생했습니다. 청바지의 전설 리바이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터닝 포인트입니다.

리벳이 박힌 리바이스의 청바지는 불티나게 팔려나갑니다. 당시 한 벌에 1달러에 불과했던 리바이스 청바지는 입소문을 타고 미국 곳곳으로 팔려나갔고 지금의 리바이스를 만드는 기틀을 마련해줍니다.

초창기 리바이스의 청바지는 오버롤이라고 불렸습니다. 지금의 바지형태가 아니라 점프슈트나 멜빵바지처럼 진짜 작업용으로 쓰이는 작업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작업복으로 인기를 얻던 리바이스의 제품은 점차 패션과 접목하고 대중화되면서 현재의 청바지의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리바이스를 대표하는 501 제품이 출시되면서 이후 리바이스는 본격적인 패션 브랜드로 자리매김합니다.

인기리에 운영중인 리바이스 매장
리바이는 독신으로 평생 살았고 1902년 9월 73세의 나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저택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로 인해 리바이스는 리바이의 조카 제이컵 스턴이 이끌었고 이후 전문 경영인 체제를 통해 170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리바이가 사망할 당시 남긴 유산은 3000만 달러.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억 5500만 달러입니다. 리바이는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유대인 회당을 설립했고 특별 기금을 만들어 고아와 어려운 이웃도 도왔습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 재단은 캘리포니아 곳곳의 학교 등을 지원하는 장학금을 조성했습니다.
뉴진스 로고
리바이는 단순히 새로운 소재의 바지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패션을 넘어 대중문화의 한축을 담당하는 발명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실 리바이스는 한때 상장폐지를 당하는 등 흥망성쇠와 부침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가치는 이제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특히 최근 K-팝 신성, 뉴진스(NewJeans)는 언제나 질리지 않는 청바지처럼 시대의 아이콘이 되겠다고 표방하며 글로벌 스타로 자리매김했는데요. 뉴진스는 리바이스 501 모델 출시 150주년을 기념한 콘서트 무대에 오르는 등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흥부전을 쓰고 있는 저 역시 지금 청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남아있을 청바지의 아버지, 리바이 스트라우스입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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