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혐오하던 나를 넘어섰다”… 美 런웨이 선 한국인 최초 ‘플러스사이즈’ 모델[복수자들]
이들의 공통점은 특정 직업에 대한 선입견을 깼다는 것입니다. 단신의 농구선수, 흑인 발레리나, 양손 없는 화가처럼 김지양 씨(37)도 ‘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깬 인물입니다. 그는 키 165cm에 70kg, 39-32-38의 신체 사이즈로 한국인 최초 미국 런웨이에 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입니다. 플러스 사이즈는 77사이즈(남성 기준 100사이즈) 이상을 뜻합니다. 여성 77사이즈, 남성 100사이즈 이상을 생산하는 기성복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의 등장은 잔잔한 호수 표면에 던져진 돌멩이와 같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생소했던 2010년, 그는 미국 최대 플러스 사이즈 패션위크인 ‘풀 피겨드 패션위크 LA’에서 한국인 최초로 데뷔했습니다. 살집이 있는 몸으로 런웨이를 당당하게 걷는 그의 모습은 ‘모델은 말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는 동양인 최초로 플러스 사이즈 모델 패션쇼 ‘캐리비안 패션위크’ 공식 홈페이지를 장식했고, 패션브랜드 ‘아메리칸어패럴’에 보낸 콘셉트 사진이 전 세계 온라인 투표에서 991명 중 8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부터 플러스 사이즈 잡지 ‘66100’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같은 이름의 플러스 사이즈 의류 및 속옷을 판매하는 쇼핑몰을 창업했습니다.
그때보다 14kg이 더 늘었어요. 지금은 99사이즈를 입고 있습니다.
―데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생소했어요. 어떻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대학교에서 외식조리학을 전공하고 요식업 관련 회사에서 일하다가 여러 가지 일들이 얽혀 권고사직을 당하게 됐어요. 퇴사 후 뭘 할지 몰라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제 길이라 생각하고 대학에서 전공한 일이 저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당황스러웠어요. 마침 그때 포털 사이트에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시즌1 지원자 모집 공고가 떴어요. 공고를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어요. 그동안 제가 살아오면서 실패하지 않을 법한 일들에만 도전해서 성취가 당연하게 주어졌는데, 모델은 실패할 것 같아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모델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셨던 건가요?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에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프로필 사진 촬영을 하는데 저를 향해 터지는 조명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삶에서 내가 오롯이 주인공인 순간이 별로 없는데, 카메라 앞에 서는 그 순간만큼은 제가 주인공이었어요. ‘이 순간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서 모델에 제대로 도전해보게 됐어요.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건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고 마음껏 먹는다는 거예요. 저희도 먹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니에요. 사이즈나 외형을 제가 에이전시나 계약한 업체에 제출한 프로필에 맞게 유지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빨간 머리를 한 프로필 사진을 제출했으면 빨간 머리인 상태로 있어야 하고, 검게 태닝을 한 모습이면 그대로여야 하죠. 몸무게가 프로필 기준 더 쪄서도 안 되지만, 더 빠져서도 안 되고요. 모델이란 직업이 가지는 특수성은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그대로 적용돼요.
또 우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처음 등장한 이유는 기성복 사이즈 이상을 입는 사람들도 모델이 착용한 옷을 보고 제대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게 해주자는 것이었어요. 모델이 무조건 마르기만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선입견인 거죠. 모델은 엄청 소식을 하거나, 아예 먹지 않는데 그런 극단적인 식단이 맞는지,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어요.
―남성 잡지 맥심에서 2021년부터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를 열고 있어요. 기존에 열던 ‘미스 맥심 콘테스트’보다 의상의 노출 수위가 훨씬 높아 뚱뚱한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 시선도 있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문제는 오랜 시간 설전을 펼쳐왔던 주제잖아요. 몸집이 큰 여성을 대상화하는 건 여성에 대한 혐오, 뚱뚱한 사람에 대한 혐오 등 다양한 혐오들이 중첩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맥심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는 미디어가 뚱뚱한 여성을 어떻게 소비하고자 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에요. 하지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일감이 정말 적기 때문에 어떤 기회라도 있다면 잡아야 하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콘테스트에 나가는 분들을 제가 비난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맥심과 같은 남성 잡지의 화보 제안을 받은 적이 있나요?
플레이보이코리아에서 제안했지만 거절했어요. 당시엔 돈을 준단 말을 안 한 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이건 제가 굉장히 오랫동안 겪어온 일이에요. 절 모델로 쓰고는 싶은데 돈을 주긴 싫은 거죠. 그런 경우 인터뷰 명목으로 절 부르고, 풀 메이크업을 시켜서 촬영을 해요. 결과물은 두 페이지짜리 화보고, 인터뷰는 아주 작게 나가죠. 일에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10년 넘게 겪어왔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대부분 쇼핑몰을 열어서 모델을 하거나, 수요가 비교적 많은 해외에서 활동하려는 분들도 있어요.
‘누가 더 예쁘게 살쪘는가’에 대한 소리 없는 경쟁이 있긴 해요. 허리가 가늘고 가슴과 엉덩이가 큰, ‘커비(Curvy)’한 몸매를 선호하죠. 결국 마른 모델을 뻥튀기해 놓은 체형이에요. 그래서 볼륨감을 키우기 위해 가슴과 엉덩이 확대 수술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 자체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기성복보다 더 큰 체형의 사람들도 자신의 신체와 잘 맞는 옷을 이미지로 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해야 하는데, 플러스 사이즈 모델조차 현실에 없는 몸매의 기준에 또 다시 맞춰지는 거죠.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최근에 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너무 오랜 기간 일에만 매몰돼 지냈던 것 같아요. 독립출판물 출간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아니다보니 5년 정도 잡지를 끌어오면서 많이 지쳤어요. 쇼핑몰을 운영하게 된 것도 힘들었어요. 주변에서 ‘너 모델 된 것도 쇼핑몰 해서 돈 벌려고 그러는 거지?’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죽어도 쇼핑몰만은 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했는데,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내몰리듯 시작했거든요. 악플에도 많이 시달렸어요.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조울증이 찾아온 것 같아요.
‘김지양은 허언증 환자’라는 악플이요. 길거리에서 헌팅을 당한 적이 있는데 너무 불쾌했어요. 싫다고 분명하게 거절했는데 계속 따라왔거든요. ‘싫다면 싫은 것이다’라고 SNS에 글을 올렸는데, ‘김지양은 허언증 환자다, 저렇게 뚱뚱한 여자를 누가 헌팅하느냐’라는 악플이 달렸어요. 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있지도 않은 남편을 있다고 거짓말한다’는 악플도 정말 황당했죠.
―모델을 꿈꿨지만 자금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쇼핑몰을 창업하셨어요. 지금도 쇼핑몰을 운영하는 게 힘드신가요?
지금은 굉장히 만족해요. 쇼핑몰 ‘66100’은 여성 66사이즈, 남성 100사이즈를 의미해요. 기성복에서 ‘라지’에 해당하는 사이즈죠. 그 이상의 사이즈를 영캐주얼이라 보통 부르는 브랜드들에서 제작하지 않아요. 그래서 66100은 ‘66 사이즈, 100사이즈 사이즈를 넘어서는 당신의 무한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저희 쇼핑몰을 이용해본 고객들은 “여기 절대 망하면 안 돼요. 여기 말고는 바지 살 곳이 없어요”라고 말씀하세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힘이 나요. 속옷도 마찬가지예요. 패드와 와이어를 없앤 속옷 상의 ‘브라렛’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허리 40인치 이상인 분들도 입을 수 있는 팬티를 만들고 있어요. 기성복 사이즈 기준으로 105, 110까지만 나오는데 저희는 130까지 커버합니다.
이중턱에 굉장히 큰 콤플렉스를 오랫동안 갖고 있었어요.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준 지 얼마 안 됐어요. 자신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에 대해 곰곰이 따져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자기혐오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올해 초 발간된 ‘엉엉 우는 법을 잊은 나에게’를 쓰면서 많이 생각을 정리했어요.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5년 간 원고를 못 보냈어요. 출판사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이야기를 바랐는데 저는 나 자신조차 건사하기 힘들어서 휘청대고 있었거든요. 그 때 자기혐오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고, 고민의 시간을 지나 작년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굴은 갸름해야 하지 않겠냐’라며 보톡스를 맞아 보라고 제안한 분도 있었어요. 보톡스는 영원하지 않아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 중독됐을 때 문제가 되는 거죠. 내가 평생을 유지할 수 없는 것에 일시적인 만족감을 가지면서 살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스스로 사랑해 줄지는 개인의 선택이겠죠. ‘누군가의 말 때문에 이중턱을 이렇게 까지나 미워하고 싫어했다면, 이제 그걸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열심히 이중턱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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