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시선] "새벽부터 밤까지 운동만 했다"가 주는 씁쓸함
한 유명 범죄 심리학자가 전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42)를 향해 한 말이다. 남현희는 희대의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16세 연하의 재혼 상대로 알려진 ‘재벌 3세’ 전청조(27)는 알고 보니, 여자였고, 사기를 한 두 번 친 넘어선 상습 사기범이었다. 남현희는 재벌 3세라는 ‘재혼남’에게 받은 고가 외제차와 귀금속, 명품 악세서리 등을 자신의 SNS에 올리기도 했다. 모두 전청조가 사기 수익을 통해 구매한 것들이었다.
사실 전청조의 사기 수법은 뭔가 허술했다. 물론 남현희는 속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벌 3세라는 말을 철썩 믿었나 보다. 하지만 남현희의 해명도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여자인지 알았지만, 성전환 수술을 해서 남자가 됐다는 얘기였다. 생식 기관을 이식하는 건 재벌이어서 가능할지도 몰랐다고도 했고, 전청조가 임신했다는 말에도 속았다고 했다. 이러니 범죄 심리학자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라고 강하게 주장했을 것이다.
경찰은 남현희도 사기 공범 혐의로 입건했고, 출국금지 조치까지 내려졌다. 남현희가 운영하는 펜싱 아카데미의 학부모가 전청조에게 사기를 당했고, 남현희까지 고소를 당한 것이다. 경찰은 전청조와 남현희의 대질 신문을 통해 공모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막장 드라마는 저리 가”라는 대중의 반응이 지배적이다. 남현희는 자신의 SNS를 통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운동만 26년, 선수촌에서 20년간 국가대표로 새벽부터 밤까지 운동만 했다. 마흔 살이 넘었는데 이걸 모를 수 없다고 (말하지만) 정말 몰랐다. 답답해 미칠 것 같다. 전청조를 만나면 왜 나한테 나타나 사람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는지 (따지고 싶다.)”
스포츠 현장을 오래 지켜봐 왔던 필자의 판단으로는 범죄 심리학자의 주장보다 “정말 몰랐다”는 남현희의 토로가 더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남현희 세대 선수들과 그 윗세대들은 물론 후배 세대들까지 새벽부터 밤까지 운동만 해왔던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운동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당시 관념이었다.
하루종일 운동만 한 선수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포츠 선수가 은퇴 후 사기 피해를 당하거나, 사기 사건에 연루되는 사례가 많다. 한 명문 프로야구팀의 4번 타자가 은퇴 후 사기를 당하고,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가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극단적 선택을 한 비극도 있었다.
운동만 하는 선수들의 문제가 현실의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공식이 오래전부터 대한민국 스포츠계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대한민국 스포츠계, 운동 선수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운동하는 애들은 공부를 안 해, 그래서 잘 몰라”라는 편향이 지배하고 있다.
선수도 학생이라면 공부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교실 밖에서 운동만 하는 학생 선수들에 대한 문제 제기는 2000년에 처음 있었다. 당시 중학생으로 시드니올림픽 수영 대표에 뽑힌 장희진이 기말고사 공부 때문에 태릉선수촌 입촌을 연기를 요청했다가 대한수영연맹으로부터 대표 선수 자격을 박탈하는 일이 있었다. 결국, 당시 선수 부모가 현실 제도를 인정하며 선수촌에 입촌하기로 하며 사태가 수습됐지만, 당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일화이다.
학생 선수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한 논의는 근래 들어서 기지개를 폈다. 주로 선수 인권 문제 측면에서 논의되어왔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이 선수 인권을 개선한다는 것이다. 이는 스포츠혁신위원회(이하 혁신위)의 발족으로 여러 방안이 구체화 됐다.
다만, 혁신위가 내놓은 ▲주말 대회 폐지 ▲학생 선수 학습권 보장 ▲최저학력제 등은 체육인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운동할 시간이 부족해져서 경기력 향상을 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혁신위의 출석 인정일수 등을 놓고는 ‘운동권’ 보장을 해달라는 요구가 나왔다. 급기야 탁구 신유빈처럼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실업 무대로 직행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사실 학습권의 본질은 책상 앞에만 앉혀두자는 게 아니다. 운동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택한 진로와 관련이 없어 보이다고 하더라도 학습을 통해 ‘생각하는 사람’으로의 성장하는 것이다. 기계처럼 운동만 해온 학생 선수들이 운동으로 성공을 거둔다고 하더라도, 선수로서의 삶을 끝낸 뒤에는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학습권’과 ‘운동권’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기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운동권 보장이라는 말 자체가 ‘운동만 하면 된다’라는 과거의 인식이 그대로라는 얘기다. 학생 선수라면 학업과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 여건과 문화를 조성해줘야 한다. 그래야 “운동하는 애들은 공부를 안해서 잘 모를거야”라는 편향을 바꿀 수 있다.
남현희는 한국 펜싱의 아이콘과 같은 인물이다. 펜싱 불모지인 한국이 펜싱 강국으로 거듭나는데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아시안게임 플뢰레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 올림픽 은메달과 동메달 등 펜싱을 대표하는 1세대 스타였다. 하지만 사기 사건에 연루된 것도 모자라, 사기 공범 피의자로 전락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운동만 해서 몰랐다”는 해명이 더욱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이석무 (sports@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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