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의 영리한 진화…신효범·인순이·박미경·이은미가 걸그룹?
‘골든걸스’는 박진영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놀라운 프로젝트다. 어느 날 박진영이 한국방송(KBS)에 먼저 연락해, 신효범-인순이-박미경-이은미로 구성된 신인 케이(K)팝 걸그룹을 만들겠다는 몽상을 들려준다. 재미난 발상이지만, 과연 될까? 카메라는 사전 섭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박진영이 네 가수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찾아가고 눈알을 굴리며 황당한 제안을 꺼내고, 진땀을 흘리며 답을 기다리는 과정을 담는다.
이름하여, ‘골든걸스’라, 기막힌 작명이다. 원래 ‘골든걸스’는 1985~1992년 방송된 미국의 유명한 시트콤 제목이다. 4명의 50~60대 여성들이 한집에 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수작으로, 에미상(미국의 티브이 프로그램 시상식)을 받았다. 네 가수가 데뷔해 한창 활동하던 시기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이들이 합숙하며 빚어낼 재미난 일들을 암시하는 예능프로그램의 제목으로 이보다 걸맞은 이름이 있으랴.
박진영은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는 자신이 소속된 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와 상관없고, 개인 자격으로 한국방송과 하려는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제이와이피에서 진행하려면 이사회의 승인이 필요해 복잡하다는 이유를 댔지만, 그보다는 이 프로젝트의 성격을 정확히 꿰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프로젝트의 방점은 ‘5060 디바로 구성된 걸그룹’이라는 초유의 ‘결과’를 얻는 것에 찍혀 있지 않다. 만약 제이와이피에서 ‘골든걸스’를 기획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실력이야 뛰어났겠지만, 관객들이 좋아했을지는 미지수다. 진짜로 흥미로운 콘텐츠는 5060 디바가 걸그룹이 되는 ‘과정’ 자체다. 이 과정을 매주 방송을 통해 보여주고, 여론의 승인과 반향을 얻는다면 어떨까. 이들이 노력하고 변화하고 우정을 쌓는 서사가 응원과 감동을 불러올 것이다. 이는 ‘댄스가수 유랑단’(티브이엔)이나 ‘스트릿우먼파이터’(엠넷)가 안겼던 여성주의적 기류와 결을 같이한다. 박진영은 이런 방송의 감과 시대의 기류를 아는 남자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박진영은 최신곡 ‘체인지드 맨’ 뮤직비디오를 김완선과 함께 작업했다. 모니카를 ‘골든걸스’ 안무가로 참여시킨 것도 이런 시류를 읽는다는 증거다.
‘골든걸스’의 기획은 한국방송이 그동안 표방해온 케이팝을 통한 세대통합의 메시지와도 맞아떨어진다. 한국방송은 유튜브 채널 ‘어게인 가요톱10’을 운영하기도 하고, 작년도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2000년대를 대표하는 와이투케이(Y2K) 콘셉트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이는 케이팝의 역사가 깊어지고 외국 팬들이 많아짐에 따라, 오래된 케이팝의 보존과 재발굴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려는 의미도 있지만, 음악을 통한 세대통합의 의미가 강하다.
한국방송은 음악을 통한 세대통합을 위해 3년 전 ‘전교톱10’ 같은 예능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0년대 가요를 지금의 10대들이 불러서 경연하고, 김형석, 이상민 등 90년대를 풍미하던 작곡가와 가수가 심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전교톱10’은 미래를 과거에 복속시킨 제 살 깎아먹기 식 세대통합이었다. 반면 ‘골든걸스’는 완전히 방향을 달리하는 미래지향적이고 상생적인 세대통합이다. 과거 사람이라 치부되기 쉬운 5060 여성들이 생생한 육성으로 요즘 노래를 부른다. 그것도 자기 스타일을 살려, ‘소울~풀’ 하게.
‘역시 방송을 아는’ 박진영은 지난 1일에 토크프로그램 ‘유퀴즈 온더 블럭’(티브이엔)에 하이브 대표 방시혁과 함께 출연하였다. 깨알 같은 신곡 홍보와 더불어 방시혁과의 오랜 우정을 과시하였는데, 여기서 ‘케이팝의 위기’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들은 확장성의 위기를 언급하며, 케이팝이 지금처럼 소수의 열성 팬덤에 의존하기보다 주변부의 라이트 팬덤이 붙을 수 있도록 대중성을 넓혀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원인 제공자들의 유체이탈 화법이냐며 힐난할 수도 있겠지만, 업계의 자성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이들은 또 케이팝 3단계론을 이야기하였다. 1단계는 한국 가수가 한국 노래를 부르는 것이고, 2단계는 한국어와 외국어를 섞어 쓰면서 교포나 외국인 멤버를 넣어 외국 팬덤의 유입을 부르는 것이다. 3단계는 현지 가수가 현지 언어로 된 음악을 케이팝의 시스템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지금 케이팝은 3단계에 진입했다. 실제로 제이와이피와 하이브는 글로벌 오디션을 진행하여 현지화된 케이팝 시스템을 추진하고 있으며, 전세계에서 수십만명의 지원자가 몰리고 있다.
어쩌면 5060 디바로 구성된 걸그룹도 3단계 케이팝의 한 유형인지 모른다. ‘현지화’는 국경을 넘을 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세대를 넘을 때도 필요하다. 5060 세대와 1020 세대 사이에는 국경 이상의 장벽과 인종 이상의 이질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한국 안이지만 케이팝의 외부였던 5060 세대들에게, 동족으로 인정되며 최고의 실력자로 검증받았고 이미 팬층을 거느린 디바들을 걸그룹으로 내세워, 케이팝의 저변을 넓히고 대중화에 성공시키겠다는 전략이 ‘골든걸스’에 녹아 있다. 박진영의 발칙한 상상이 아닌, 완벽한 언행일치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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