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성 그치지 않는 세계…신성한 ‘한미동맹’만으로 안전해질까
가치외교·글로벌 중추국가…윤 정부 ‘과대망상 이념외교’
미일 밀착 뒤 중국과 척지나…안보·경제 국익 교집합을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미얀마 등 세계 곳곳에서 포성과 비명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반도와 대만해협에서도 오래전부터 미사일과 전투기의 굉음이 들려오고 있다. 심화되고 있는 미-중 갈등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러한 카오스 상황에서 제30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정상회의가 오는 15일부터 17일까지 한국과 미국, 중국, 러시아 등 21개 회원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다. 세계 모든 언론이 이번 아펙 정상회의를 주시하고 있다.
미-중 대결 속 ‘일관성 잃은 외교정책’
한국은 유라시아대륙 동쪽 끝 한반도 남쪽에 자리한 △면적 10만400㎢ △인구 5160만명 △국민총생산(GDP) 1조7200억달러의 분단국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상황이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고, 미칠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진보와 보수 어느 쪽이 집권하든 한국이 가진 지정학적 현실을 무시한 대내외 정책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현재 및 미래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나라는 물론 ‘세계제국’(World Empire) 미국과 인접한 강대국 중국이다. 미국은 2만8천여 병력을 우리 영토에 주둔시키고 있는 동맹국이고, 중국은 제1무역상대국이다. 같은 산에 호랑이 두마리가 함께 살아갈 수 없듯이 글로벌 패권을 추구하는 미국과 중국이 공존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존재론적 위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 간 극단적 정쟁 속에서도 중국을 계속 견제하고 있다. 내년 11월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가 민주당 후보에게 승리할 경우 중국 견제는 강도를 더해갈 것이다.
한국은 지금 경제위기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 없으며, 평생 한국이라는 우물 안 개구리로만 살아온 이들이 잇따라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로 인해 우리 외교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미국식 세계관의 세례를 받은 인사가 청와대(용산) 안보실을 주도하면서 자기 이념과 아이디어를 현실 외교에 적용하는 실습장으로 기능해왔다.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일반 국민은 물론 국회, 심지어 직업외교관들에게도 해당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일방적 외교를 추구했다. 필자가 외교부 과장으로 있던 2009년 외교정책 설명회나 주중대사관 총영사로 재임 중이던 2013년 해외공관장회의 계기 외교정책 설명회를 주관한 당시 정부 외교안보수석조차 그 정부의 외교정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정권 교체 시마다 외교·대북정책 기조가 정반대로 바뀜으로써 야당은 물론, 다른 시각을 가진 언론과 국민들의 반발을 사 정책 수용성이 크게 떨어졌다. 지난 정부와 180도 다른 방향의 외교안보정책을 주문받는 외교부와 통일부, 국방부, 국정원 등 외교안보 부처 공무원들은 특히 새 정부 초기 집단 ‘멘붕’에 빠져들곤 한다. 2006~2008년 주제네바 한국대표부에서 인도지원 담당관으로 근무했던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교체된 직후 제네바와 뉴욕에서 잇따라 개최된 ‘대북 인도적 지원 관련 국제연합 주관 회의’에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을 발표해야만 했던 당혹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다.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완전히 다른 방향의 정책을 수행해야만 하는 우리 외교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미국과 중국, 일본, 북한 등 상대 국가(세력)를 포함한 국제사회로부터 점점 신뢰를 잃었다.
정부, 홍범도 등 역사적 부관참시
현 정부는 낭만적 민족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던 문재인 정부 외교·대북정책에 대한 적대감에 가까운 반작용으로 문재인 정부보다 더 심한 이념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현 정부는 ‘가치(자유) 외교’와 함께 ‘글로벌 중추국가’를 주창하는 등 경제력 기준 세계 13위에 불과한 한국의 국력을 크게 벗어난 ‘과대망상(megalomaniac) 외교’를 추진하고 있다는 평도 듣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방문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모두 절대왕정국가이고, 이전에 방문한 베트남은 공산주의국가다. 가치 외교가 먹혀들어갈 만한 나라가 아니다. 미국의 가치 외교도 미국에 대항하는 중·러에 대한 동맹국들의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적용된다. 그리고 글로벌 안보 이슈 등에 대한 적극 대응을 요지로 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는 미국 외에는 없다. 또 한·미·일 협력 체제 강화와 이를 위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및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중·대러 정책을 포함한 현 정부의 외교에는 이명박 정부 시절 횡행했으며, 일제 식민통치를 긍정적으로 보는 뉴라이트적 요소가 녹아 있다. 현 정부는 일본 정부보다 한술 더 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해양생태계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기까지 한다. 정부 내외곽의 뉴라이트 인사들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은 물론,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레닌 집권기 소련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홍범도를 포함한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칭하면서 역사적 부관참시를 하기도 했다. 뉴라이트 세계관에 영향받은 인사들은 한국이 일본·북한·대만과 함께 일본제국 해체 결과 1948년 8월15일에 건국된 신생국가라고 말한다. 고대에 건국되어 몇천년을 이어온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전면 부인하는, 이른바 ‘건국절’ 주장이다.
현 정부의 외교·대북정책이 과거 회귀적 성격을 띠는 근본적 이유는 현 집권세력이 국정 목표와 방향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주원인으로 보인다. 명확한 국정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할 경우 철학·정책적 아노미에 빠지기 쉽다. 현 정부는 ‘한-미 동맹’을 신성한 국가 목표로까지 격상시켜놓았다. 송시열 등 성리학자들이 ‘명나라 숭배’를 국왕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가치로 만들어놓았던 것과 유사하다. 현 정부는 한·미·일 3국 군사동맹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듣고 있다. 이는 한국을 대중 최전선 국가로 만드는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한편, 국내 보수주의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 대북정책이 ‘중국 중시’, ‘북한 우호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급진적 대북정책을 취하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저자세 외교, 일본에 대해서는 비우호적 태도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임 정부가 주도한 ‘대북 전단 금지법’ 제정과 ‘신경제 구상이 담긴 유에스비(USB)’를 북쪽에 전달한 것 등을 근거로 든다. 특히, 중국에 대해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지극한 충성심’을 뜻하는 ‘만절필동’과 ‘중국몽 동참’ 등의 표현이 굴종적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한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맞는 종합적인 외교전략이 부족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이것을 근거로 문재인 정부와 반대편으로만 나아가는, 즉 극단적 외교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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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무역국 중국과 ‘최전선’ 피해야
미국이 대중 무역정책을 디커플링(탈동조화)에서 디리스킹(위험회피)으로 전환하는 한편, 샌프란시스코 아펙 정상회의를 앞두고 고위 인사를 중국에 파견하는 등 화해 제스처를 취하고 있음에도 미-중 간 근본적 갈등 완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아펙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중 정상회담이 개최되지만 갈등이 전면적으로 해소되리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한국은 디리스킹 전환에도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통화기금은 지난 10월18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디리스킹이 본격화할 경우 한국 국내총생산액은 4%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일본과 유럽연합, 미국의 손실액을 크게 능가하는 수준이다. 미국은 지난 10월17일 낮은 사양 인공지능 반도체의 중국 수출도 금지했다. 중국은 이에 맞서 지난 10월20일 전기자동차 핵심 소재인 천연 흑연 수출을 오는 12월부터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세계 전기차업계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중 두 나라의 신규 수출 제한 조치는 아펙 정상회의를 바로 앞두고 나왔다. 아펙 정상회의 계기로 정상회담이 개최되더라도 미-중 갈등이 대폭 완화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미-중 전략적 경쟁 또는 신냉전은 미래 패권을 결정할 과학기술 경쟁은 물론, 대만해협,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에 대한 주도권 등 두 나라의 핵심 이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은 안보와 경제 이익의 교집합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우리는 계란을 몽땅 한 바구니에 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미-중 갈등 지속과 함께 북한의 핵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충돌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서라도 한-미 동맹 강화는 불가피하다. 일본과의 협력도 증진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에 지금과 같은 저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중국과의 관계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대중국 최전선에 서는 것을 자청해서는 안 된다. 중국은 제1무역상대국이다. 경제력이 약화될 경우 한국은 한·미·일 협력 체제에서, 미국과 일본을 받드는 모양의 이중 하위 파트너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 심지어 북한과의 갈등도 줄이고, 협력 공간을 넓힘으로써 안정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정권에 따라 일본과의 협력 체제와 중국 중시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쏠리는 것을 막으려면 철저하게 국익에 기초한 외교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일관성 있는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지정학적 단층선상의 국가인 한국에서 사람들은 입만 열면 서로를 물어뜯는다. 상대를 향한 적대감과 증오가 하늘을 찌른다. 맹자는 “나라는 스스로 해친 다음에야 남이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고 했다. 외교의 이념화는 국가 사회의 분열을 가속화한다. 이념을 앞세워 국민들 간 갈등을 부추기는 말과 행동은 지금 당장 멈춰야 한다.
백범흠 서울대 초빙교수·전 주프랑크푸르트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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