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미술 허브는 홍콩만?…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이 바꿨다
미술로 보는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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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서울에서 두 번째 열린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서구 메이저 갤러리의 디렉터 친구가 내게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구 갤러리 8곳이 추가로 서울에 갤러리를 오픈할 계획이라는데 한국 시장이 그럴 만하냐고 말이다. 홍콩 지점 디렉터로 아시아 시장 전반을 담당해온 그의 질문은 사실 우리 모두의 궁금증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고가의 그림을 사는 컬렉터 수는 많지 않아 대부분은 그가 잘 알고 있고 이미 홍콩에서 편히 거래하고 있다. 따라서 굳이 한국 시장을 보고 갤러리를 따로 열 이유가 없는데 과연 서울이 메이저 갤러리들의 경연장이 될 만한 아시아 미술의 허브가 될 수 있냐고 물은 것이다.
두 번의 프리즈를 통해 한국 미술계가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자금의 유입을 지켜보면서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년 프리즈 기간에는 ‘한남나이트’와 ‘삼청나이트’라는 이름으로 이틀에 걸쳐 서울 한남동 일대와 삼청동 일대의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야간 개장 및 파티를 열었다. 2023년에는 ‘청남나이트’가 추가돼 프리즈 기간 나흘 중 사흘 밤이 축제 분위기였다. 참여한 갤러리와 미술관 수만 고려해도 이 기간에 열린 파티가 족히 100개는 넘었을 것이다.
파티만 100개 이상
청담동의 개인주택을 개조한 작은 갤러리의 저녁 티파티에 참석했다. 전시 중인 작가와의 인연 때문에 들렀는데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대형 갤러리만 참여가 허용되는 프리즈 대신, 같은 기간 한국화랑협회 주관으로 함께 열리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부스를 마련한 작은 갤러리여서 조용히 전시만 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수십 명이 실내와 정원까지 꽉 들어찼다. 게다가 그중에는 드라마 <파친코>에 출연한 일본의 유명 여배우 미나미 가호가 있었다. 이런 조그만 갤러리의 파티에 외국 셀럽의 등장이라니! 국제나 페이스 등 대형 갤러리들의 화려한 파티를 생각하면 프리즈를 핑계로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얼마나 많을지 실감케 한 장면이었다.
강동구 ‘라이트룸 서울’에서는 갤러리현대를 주축으로 에스더쉬퍼, 도쿄화랑, 펫츨, 리슨갤러리 등 내로라하는 메이저 갤러리들이 프리즈 VIP를 대상으로 ‘서울 아트나이트’라는 행사를 열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 100명을 동원해 성능경 작가의 퍼포먼스를 시연하고 이희문 밴드가 공연하는 등 미술행사라기보다는 무슨 케이(K)팝 공연장 같은 분위기에 최소한 수억원대 예산이 필요한 대형 행사였다. 게다가 프리즈 VIP 고객을 대상으로 한 명품 음료업체들의 협찬으로 고가의 샴페인, 와인, 맥주, 생수가 무제한 무상 제공돼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단맛을 물씬 느끼게 하는 행사였다.
프리즈에서 그림을 살 정도의 고객이라면 명품 브랜드의 주요 고객층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기간에 거의 모든 명품업체가 자사 VIP와 프리즈 VIP 고객을 대상으로 프라이빗 행사를 연다. 2023년 보테가베네타는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강서경 개인전의 후원을 맡아 행사 전날부터 이틀 연속 VIP 초청 ‘나이트 파티’를 진행했고, 에르메스재단은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박미나 개인전을 중심으로 프리즈 ‘청담나이트’를 열었다. 그 외에 생로랑, 구찌, 불가리, 디올, 프라다 등도 VIP 초청 행사를 마련했다. 이런 행사에는 해당 브랜드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연예인이 참석하고 가벼운 공연이나 작가의 토크를 함께 진행해 보고 즐길 거리를 다양하게 제공한다. 이쯤 되면 프리즈 기간 중 서울은 매일 밤 파티가 이어지는, 소위 VIP라면 한번쯤 와보고 싶은 도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명품은 미술과 여러모로 닮았다. 샤넬은 첫해인 2022년부터 프리즈와 파트너십으로 ‘나우 앤 넥스트’(Now & Next)라는 제목의 영상 시리즈 제작으로 한국의 신진·기성 현대 작가를 소개한다. 2022년에 이어 2023년에도 기성작가 3명과 젊은 작가 3명의 작품을 선보였고, 임민욱과 장서영의 토크 등 관련 행사를 열었다. 샤넬은 예술적 혁신을 촉진하고 예술가가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앞으로 펼쳐질 미래(What happens next)의 일부가 되라”는 창립자의 유지를 실천한다. 언뜻 값비싼 작품이 아니어서 ‘돈 안 되는 아방가르드 작업이라니’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유행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패션업체야말로 시대를 앞서가는 아방가르드와 유사하다. 따라서 누구보다 아방가르드의 영감을 필요로 한다. 샤넬에는 명분과 실속을 겸비한 기획이었고, 이는 다른 명품업체도 다르지 않다.
거의 돈벼락이라 부를 만한 엄청난 돈이 프리즈 기간에 다양한 형식으로 살포됐다. 이 돈이 외국 컬렉터를 서울로 불러들이면서 우리 미술 저변의 체력을 키우는 낙수효과를 낳을 때 서울은 아시아 미술의 허브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세계미술의 아시아 허브인 홍콩은 금융허브로서의 오랜 전통과 중국 컬렉터의 구매력에 의지해 크리스티, 소더비의 아시아 미술 경매와 가고시안을 비롯한 서구 메이저 갤러리의 입점을 제외하고 별다른 미술 인프라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M+미술관 개관을 비롯해 로컬 작가들을 소개하는 실력 있는 로컬 갤러리들의 등장, 20여 년간 아시아 미술의 아카이빙(기록·보관) 작업을 지속하는 아시아아트아카이브(AAA)나 동시대 미술의 전시공간으로서 세계적인 작가들을 소개하고 배출하는 패러사이트 등 민간단체의 역량에 힘입어 현대미술의 소프트파워가 급속하게 성장했다.
서울-홍콩 ‘더블 허브’로
최근 홍콩의 정치적 상황은 홍콩의 위상에 악영향으로 작용하지만 중국의 압도적인 구매력을 고려하면 감수할 위협일 것이다. 우리는 서구의 미술도시로 뉴욕·런던·파리를 비롯해 수많은 도시를 떠올리면서, 아시아 미술의 허브 도시는 홍콩 하나뿐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 최근 세계경제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제는 단일 허브가 아니라 다수의 도시가 네트워크를 구성하면서 허브화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구매력에서는 다소 뒤처지지만 정치적 자유와 케이팝, 케이엔터테인먼트를 배경으로 우리 미술의 체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구매력의 약세를 상쇄한다면 홍콩의 소프트파워와 연계하는 아시아 미술의 서울-홍콩 ‘더블 허브’를 구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승현 미술사학자 shl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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