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의 무덤’ 되어가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주간경향] ‘어떤 상황에서도 민간인 살상을 최소화하라’. 국제법의 첫 번째 원칙이다. 이 원칙은 그러나 가자지구에서 한 달 넘게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비껴가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하리란 전망이 짙어짐에 따라 이번 전쟁은 수많은 무고한 이들의 무덤, 더 나아가 국제법의 죽음으로 기록될 위기에 처했다.
빛바랜 ‘민간인 보호’
여기서 말하는 국제법이란 1949년 제네바협약과 여기에서 파생된 추가 의정서들을 포괄하는 국제인도법(IHL), 종류별 무기 사용 규약,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전쟁범죄 규정 등을 총칭한다. 이러한 여러 국제법은 전투행위와 무관한 이들을 보호하고 전투의 수단과 방법을 제한함으로써 무력 충돌로 인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러 국제기구와 인권단체의 평가를 종합하면,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에서 크게 ▲백린탄 사용 ▲경고 없는 공습 ▲병원과 구급차 위협 ▲난민촌·빵집 등 민간시설 공격 등을 저질러 국제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는다.
국제앰네스티는 이스라엘군이 지난 10월 중순 헤즈볼라를 상대로 레바논 남부를 공습할 때 백린탄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앰네스티가 주민과 의사 등을 인터뷰해보니 이들이 묘사한 냄새, 발화 형태 등이 백린탄의 그것과 같았다. 백린탄 불꽃이 몸에 닿으면 살이 뼈까지 타들어 가기 때문에 백린탄은 ‘악마의 무기’, ‘악마의 비’로 불리며 국제법상 사용이 엄격히 제한된다.
경고 없는 공습의 경우 지난 10월 31일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 난민촌 공습이 특히 문제가 됐다. 당시 대규모 폭격을 경험한 주민들은 “빵을 사러 줄을 서 있었는데 경고도 없이 미사일이 떨어졌다”고 진술했다. 과거 이스라엘은 공습 전 주민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비폭발성·저화력 탄약을 사전 경고성으로 지붕에 떨어뜨리는 일명 ‘루프노킹(지붕 두드리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같은 조치가 없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했다.
빵집과 구급차 등 민간시설 공격 또한 비판받고 있다. 국제법에 따르면 민간시설을 불가피하게 목표물로 삼아야 할 때도 모든 공격은 목표물의 군사적 가치에 비례해 행해야 한다. 유엔에 따르면, 11월 7일 현재 가자지구 북부에서 운영 중인 빵집은 단 한 곳도 없다. 폭격으로 파괴됐거나 밀가루와 연료 공급이 끊겨 가동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빵을 사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설 때도 공습에 노출되는 실정이다. 의료시설 피해도 이어져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이스라엘군이 이달 초 가자지구 북부 알시파 병원 인근에서 구급차를 공격했다며 “전쟁범죄로 조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둘 다 잘못했다, 하지만…
이스라엘도 이번 전쟁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보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지난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 마을을 공중, 육상 등으로 침투하면서 이스라엘인 약 1400명이 무참히 살해됐다. CNN이 정리한 통계를 보면, 이번 인명 피해 규모는 2008년부터 15년간의 이·팔 분쟁에서 사망한 이스라엘인의 총합보다 월등히 크다. 하마스의 살해 방식도 잔인해 가족과 이웃을 잃은 이스라엘인들의 충격과 분노가 터져나왔다. 아직 인질 약 200명이 생사조차 불분명한 상태로 붙잡혀 있다.
하마스의 행위 또한 국제법 위반이다. 싱크탱크 미 외교협회(CFR)의 데이비드 셰퍼 연구원에 따르면, 하마스가 아동을 포함한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제네바협약, ICC의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규정 등 국제법 다수에 저촉된다. 비국가행위자인 하마스가 국제법 적용을 받는 주체인지에 대해선 견해가 갈리나,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자체 군사력을 보유한 사실상의 통치자라는 점에서 국제법 준수 의무가 있다”고 셰퍼 연구원은 해석했다.
이처럼 하마스와 이스라엘 각각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제로섬’은 아니다. 양측 모두 국제법을 위반한 정황이 있으며, 각자가 택한 방식이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로 이어졌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잘못, 하마스의 잘못을 별도 맥락에서 언급한다고 해서 ‘둘 다 잘못’이라는 기본 전제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비례성의 원칙’ 넘어섰나
전쟁 초기에는 국제사회에서도 하마스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행한 가자지구 봉쇄, 병원·난민촌 폭격, 무차별한 공습의 명분으로 번번이 “하마스가 먼저 그랬다”를 들고나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스라엘은 전쟁 3일 차인 지난 10월 9일부터 가자지구 봉쇄를 선언하며 연료, 수도, 전기 공급을 끊었다. 이 같은 비인도적 처사는 민간인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학살’, ‘집단처벌’이란 비판을 받았다. “전쟁에도 규칙이 있다.”(10월 13일), “하마스의 공격이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10월 24일)라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언급이 대표적이다. 다른 여러 국가도 이스라엘의 민간인 위협을 규탄했으나, 이스라엘은 자국이 본 피해를 호소하며 반박해왔다.
이에 대해 HRW의 클라이브 볼드윈 수석법률고문은 “국제인도법은 상대방이 무엇을 했는지와 무관하게 적용된다. ‘상대방이 먼저 공격했다’는 이유로 내가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하거나 집단처벌을 가하는 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가자지구 참상을 규탄하는 여러 주체의 메시지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의 수단이 ‘목적에 비해 지나치다’는 것이다. 이는 곧 국제인도법상 ‘비례성의 원칙’을 위반했을 가능성을 지목한다. 특히 민간인이 밀집 거주하는 난민촌이 공격을 받았고, 누적 사망자 절반가량이 아동과 여성이란 사실은 이스라엘에 불리한 정황이다.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많은 민간인 사상자와 파괴 규모를 고려할 때 자발리야 난민촌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은 전쟁범죄에 해당할 수 있는 불균형적 공격”이라고 밝혔다.
지난 10월 말 ICC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중 누가 저질렀든, 어떤 범죄에 대해서든 조사하고 있다”며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벌어진 전쟁범죄 혐의를 적극적으로 밝히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란 생각으로 버티는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국제법은 너무 멀다. ICC 상설재판소가 지난 21년 동안 내린 유죄판결이 10여 건에 불과하다는 점과 판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은 ‘국제법에 따른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오랜 법언이 오늘날 가자지구에서 또다시 뼈저리게 입증되고 있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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