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전직여군이 사랑했던 팔레스타인 화가…이것은 실화였다 [나쁜 책]
2014년 5월,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 소설 한 권이 발표됩니다. 여성 작가가 쓴 276쪽짜리 책이었습니다. 겉보기엔 흔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2년 뒤인 2016년,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가디언 등 유명 신문이 이 소설을 둘러싼 논란을 대서특필합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책을 금서로 지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서 지정 사유는 “무슬림과의 결혼을 조장하는 책”이었습니다.
9·11테러 발생 후 1년이 지난 2002년 뉴욕을 배경으로, 전직 군인이던 이스라엘 여성과 팔레스타인 남성의 운명을 다룬 소설입니다. 둘은 ‘정치’ 때문에 이별하고, 끝내 죽어서야 재회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작가 도리트 라비니안 장편소설 ‘All the Rivers’를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FBI는 리아트를 탐문합니다. 아랍인 외모의 리아트가 ‘카페 아쿠아리움’에 자주 모습을 보이자 누군가 리아트를 아무 이유 없이 신고한 것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테러 우려와 공포 때문에 아랍인의 경우 FBI의 불심검문을 자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리아트는 히브리어 번역가였고,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자 뉴욕에 장기간 체류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리아트가 ‘카페 아쿠아리움’에 다시 갔던 날, 그녀는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젊은 남성 힐미(Hilmi)와 시선이 마주칩니다. 둘은 서로의 운명을 알아봅니다. 아름다운 외모,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런 힐미는 비(非)무슬림이자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알라 외에 신은 없다(La ill’a ila Allah)”란 말을 ‘믿지 않는’ 부친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힐미는 자신이 무경계의 예술가이길 희망했지요.
서로 적대국의 국민이었지만 유년 시절 살았던 공간이 그리 멀진 않았던 두 사람은 상대와의 대화에 집중합니다. 한때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신기한 인연. 둘은 사랑에 빠지고 잠자리를 갖습니다.
테러 이후 정국은 혼란스러웠지만, 두 사람에게 국적보다 중요한 건 사랑이었습니다. 한 국가의 시민이기보다는 그저 ‘한 명의 개인’이길 희망했던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게 몰입했습니다.
이제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스라엘 여성은 군대에 의무 복무합니다. 리아트도 여느 이스라엘 여성처럼 이스라엘 방위군(IDF) 출신이었지요. 후방 사무직이었지만,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이었습니다.
힐미는 리아트가 11년 전 군대 상관에게 선물받은 유대교 성경책(구약 성경)을 보고 흠칫 놀랍니다.
리아트가 이스라엘 출신이니 당연한 사실이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당황스러웠습니다. 힐미는 이에 유대교 구약성경책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대원들에게 나눠주는 이슬람 코란’과 비교합니다. ‘IDF가 성경책을 지급하는 것과 하마스가 코란을 주는 일은 근본적으로 동질적’이라는 의미였지요.
그 얘기를 들은 리아트는 “어떻게 하마스와 IDF를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라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팔레스타인 남성 눈엔 ‘하마스와 IDF의 대립’이었지만, 전직 군인이었던 이스라엘 여성의 눈에 하마스는 불법 무장단체였으니까요.
이와 반대로 리아트는, 10대 시절 아랍 사람들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납치될까 두려워 손가락 사이에 ‘바늘’을 쥐고 다녔던 기억까지 끄집어냅니다. 둘은 그만큼 서로의 ‘나라’에 적대적인트라우마가 깊었지요.
그러다 문득, 두 사람은 대화의 위험성을 감지합니다. 과거를 들추면 결국 이별이 불가피했는데, 두 사람은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으니까요. 역사적 사건은 둘의 앞날에 펼쳐질 사랑 앞에서 그저 ‘배경소음’에 가까웠습니다.
두 사람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합의합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현재보다 미래가 중요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둘만의 착각이었습니다.
문제는 지납의 부친이 과거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고위 멤버였고, 이스라엘 특공대에 의해 ‘암살’ 당한 인물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지납과 동료들의 눈에, 리아트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정치 얘기를 하지 않기로 했던 연인의 밀약은, 와인을 곁들인 소박한 식사가 진행되자 점점 깨지기 시작합니다. 테이블 위 대화는 격렬하게 변해 갑니다.
이 소설 ‘All the Rivers’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이 지점,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벌어진 첨예한 대화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입장과 이스라엘의 입장을 민낯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깃발과 정부 아래서 존엄하게 살아갈 자격이 있어. 만약 우리 세대가 타협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가 명확한 국경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비참한 길을 가게 될지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아.” (“the Palestinians deserved to live in dignity under their own flag and government.” (…) I said that if our generation couldn‘t reach a compromise, if we didn’t agree on clear borders now, while it was still feasible, “I don‘t even want to think about what sort of disastrous path we’ll be on.” 소설 155쪽, 리아트의 말)
② 하지만 테이블에 동석한 와심(Wasim)이란 남성은 재차 이스라엘의 ‘점령’을 비판합니다.
◎ “리아트, 리아트,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은 깨어나 눈을 떠야만 해. 너희는 무슨 불경 외듯이 멍청하고 진부한 슬로건만 계속 외치고 있는데, 그건 실제로 수년간 불가능했어.” 그(와심)는 씁쓸하고 자기만족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Liat, Liat, you people have to wake up, open your eyes. You keep reciting that stupid, worn slogan about two states, like a mantra, when in reality it’s been impossible for years.” He gives a bitter, self-satisfied laugh. “It’ll never happen.” 164쪽, 와심의 말)
◎ 와심은 이쑤시개로 허공을 찌르며 당황하지 않고 계속했다. “이스라엘-아랍 인구의 출산율은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이지.” 그(와심)는 아랍의 출생률을 믿고 기다릴 것이다. 아마도 그의 역겨운 오만과 보복적 기질보다 이 암울한 미래에 대한 그의 비전,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두려움이 나(리아트)를 화나게 하고 반복적으로 그와 충돌하게 만들었다. (Wasim carries on unfazed, stabbing the air with his toothpick. “The Israeli-Arab population’s reproductive rate is another irreversible reality.” (…) he’ll put his faith in the Arab birth rate and wait it out. Perhaps more than his loathsome arrogance and vindictive temperament, it is his vision of this bleak future, and my fear that he may be right, which outrage me and drag me into repeatedly clashing with him. 166쪽)
④ 리아트는 아랍 민족주의자인 지납과 와심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 “우리가 한 억압을 다른 억압으로 바꾸지 않겠다고 어떻게 약속할 수 있지?” 나는 끈질기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대부분의 무슬림 아랍인들 사이를 살아가는 민주적인 유대인 소수민족인 우리가 어떻게 홀로코스트같은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이지?” (“how can you promise me that we‘re not going to just switch one oppression for another?” I pound the table insistently: “How can we, a democratic Jewish minority in a majority of Muslim Arabs, be sure that a catastrophe like the Holocaust won’t happen ag-” 167쪽, 리아트의 말)
그리고 시간이 흘러, 리아트는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옛 연인 힐미가 해안가에서 (아래 기사에서 후술할) 익사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힐미의 사랑은 이제 리아트의 기억에만 남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이 그저 허구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20대 시절의 뉴욕 체류, 진실되게 사랑했던 팔레스타인 남성, 친구들과의 격렬한 대화, 이별 후 익사사고로 인한 옛 연인의 사망은 전부 작가의 실제 경험이었습니다.
도리트 라비니안의 옛 연인은 지금은 사망한 팔레스타인 화가 하산 올라니(Hasan Hourani·1974~2003)였습니다.
소설 속 리아트는 작가 도리트 라비니안의 분신, 힐미는 하산 올라니를 문학적으로 부활시킨 인물인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설 ‘All the Rivers’는 이제 세상에 없는 하산 올라니를 위한 작가 도리트 라비니안의 ‘헌정의 서’이기도 했습니다.
훗날 국방부 장관, 총리직을 역임하는 당시 이스라엘 교육부 장관 나프탈리 베네트는 “소설 ‘All the Rivers’가 감수성이 예민한 이스라엘 청소년들에게 팔레스타인 이성과의 통혼(通婚)을 부추길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이 책을 사실상 금서로 분류해 버립니다.
이후 이스라엘 문학 강의에서 ‘All the Rivers’는 원천 배제됩니다. 2014년 첫 출간 당시 이스라엘 신문 하아레츠(Haaretz)가 ‘All the Rivers’를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음에도 금서로 지정해 버리지요.
서점에선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이 책의 구매를 위해 줄을 설 정도였습니다. 작가 도리트 라비니안은 한 기고를 통해 당시 겪었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끈질긴 저항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이 책 ‘All the Rivers’의 실제 주제는 리아트로 대표되는 유대인 여성의 정체성이 아랍인 힐미의 정체성에 용해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 이 책의 금서 논란 이후 제기된 수많은 목소리와 이상한 얼굴, 문자 메시지와 전화 통화, 알림, 게시물, 공유, 트윗 등 모든 것은 너무 터무니없고 기괴한 일들이다….” (2017년 4월 25일, 도리트 라비니안의 미국 타임지 기고 중 일부)
이 책엔 ‘물의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리아트와 힐미가 만났던 장소는 ‘카페 아쿠아리움’이었고, 힐미가 자유롭게 가지 못했던 ‘가자지구의 바다’도 언급됩니다. 제목에도 강(river)이 언급됐습니다. 작가 라비니안은 ‘물’을 통해 무엇을 은유하려 했던 걸까요.
그런데 그의 연인 라비니안이 쓴 소설 첫 부분에서, 리아트는 힐미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자지구에는 바다가 있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리아트에게 힐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힐미)는 놀라울 정도로 의기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는 그곳이 모든 사람들의 바다가 될 거야.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수영하는 법’을 배우게 되겠지.” (“But one day, you know,” he went on in surprisingly high spirits, “one day it’ll be everyone’s sea, and we’ll learn how to swim in it together.” (26쪽)
힐미의 바다, 하산 올라니의 바다는 얼마나 가깝고 또 멀까요. 아마도 도리트 라비니안은 옛 연인 하산 올라니에게 소설 속에서 그 자유의 공간을 ‘선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힐미가 말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수영하는 법을 알게 될 바다’는 국적이나 종교 또는 이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화합하는 평화의 공간을 의미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강물(제목 ‘All the Rivers’)은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바다라는 하나의 통합적 공간에서 하나로 뒤섞이며 ‘합일’을 이룹니다. 강은 서로 다른 물빛, 길이, 면적을 가졌지만 바다에서는 결국 하나의 뒤섞임을 경험하니까요.
결국 ‘언젠가는’ 하나의 만남을 이룰 것임을 작가 도리트 라비니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현실세계에서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하지요. ‘소설은 무용(無用)하다’고도 누군가는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포성과 비명이 느껴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소식을 들으면서, 이런 소설을 읽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필요했던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훗날 한국에서도 이 책이 출간되길 기다려 봅니다.
※다음주에는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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