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빌라’에 달린 밥줄···가난의 상처와 온기[책과 삶]

임지선 기자 2023. 11. 1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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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예정 지역의 집주인과 세입자, 그리고 아이들··
작가 김혜진 세 번째 소설집
“살았던 집들이 나를 위로·격려, 단련시켜”
소설가 김혜진이 <축복을 비는 마음> 단편 소설집을 출간했다. ⓒ김승범

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문학과지성사|292쪽 |1만6000원

한국 사회가 ‘아파트 공화국’이라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곳곳에 ‘맨션’이라 불리는 빌라, 가파르고 위험한 계단이 옥상까지 이어지는 다세대주택, 곧 밀려버릴 재개발 지역이 가득하다. 그곳에는 사람이 산다. 그 집을 산 이들과 그 집에 살고 있는 이들. 김혜진의 단편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바로 이들에게 조명을 켠 작품이다.

호수엄마에게 장 선생은 요즘 204호 때문에 잠을 못 잔다고 전화한다. 호수엄마는 “명진빌라죠? 이번 달에도 안 들어왔어요? 세상에 정말 못 믿을 사람들이네. 이번 달엔 틀림없다고 그렇게 못을 박더니”라며 확실히 해결하겠다고 한다. 장 선생은 호수엄마에게 싸게 전세를 내주고, 호수엄마는 달동네인 산무동 320-1번지 명진빌라의 월세를 제때 받아준다. 빌라의 청소도 때론 맡는다. 호수엄마는 장 선생이 지목한 빌라의 ‘관리인’인 셈이다.

두 달치 월세가 밀린 204호에는 지난달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형편이 여의치 않은 재민엄마가 산다. 호수엄마는 “사정 뻔한 거 알지만 내가 그걸 장 선생한테 어떻게 일일이 설명할 수 있어”라며 용건을 꺼낸다. 집주인은 사정을 모른다. 알려 하지 않는다. 월 55만원을 받기 위해 굳이 주차장 없는 산동네까지 고급차를 끌고와 독촉하지 않는다.

재민엄마네 조카는 월세를 독촉하는 ‘관리인’에게 바락바락 따진다. 깨진 타일, 망가진 화장실 방충망을 직접 고쳤다고. 싱크대 물 새는 걸 손봐달라고. 호수엄마의 남편 작남은 같이 따진다. “이 동네 집들이 다 이래요. 내일이라도 허가 나면 다 부술 집들인데 어느 주인이 예예, 하고 수리를 해주겠어요. 그래서 보증금이 싸잖아. 어쩌겠어. 불편한 게 있어도 참고 살아야지.” 재민엄마는 월세 대신 우선 만원짜리 5장이 든 봉투만 내민다.

서울 중구 남산에서 바라본 다세대 주택 밀집 지역. 성동훈 기자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대산문학상, 젊은작가상, 김유정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한 김혜진의 <축복을 비는 마음>에는 ‘집’을 둘러싼, ‘집’에 사는 사람들의 여러 마음을 하나의 코바늘로 짜낸 8편의 단편이 담겼다. 소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동산을 둘러싼 역학관계와 도시 속에서 지워진 가난의 상처들을 시리도록 차갑게 내보인다. 책에는 번듯한 아파트 공화국의 일원이 되기 위해 철거 대상으로 지정되길 기다리는 재개발 지역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주택 노후화, 부족한 기반시설과 같은 문구가 가진 추상성을 스케치하듯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면서도 책은 사람다움, 온기를 잃지 않는다.

호수엄마가 주인공인 ‘산무동 320-1번지’도 그렇다. 호수엄마는 재개발을 바라보는 집을 사둔 집주인과 언제 집을 비워줘야 할지 모르는 세입자, 그 둘을 오가며 삶을 지탱한다. “이 나라는 부동산 때문에 망할 거야. 이 썩은 빌라들에 도대체 몇 사람의 밥줄이 달려 있는 거야, 세상에.” ‘재개발이 빨리 돼야 일을 그만한다’는 남편에게, 그러면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타박한다. 호수엄마는 재민엄마가 준 봉투에서 다시 3장을 꺼내 재민엄마에게 준다. 돌아가신 할머니 조의금이었다.

‘20세기 아이’에는 두 아이의 시선이 대비된다. 옥상에서 물이 새고 곰팡이가 가득한 집에 세들어 사는 세미는 물난리 이후 떠내려온 장화를 3000원에 내다판다. 변두리 단독주택이 투자처로 적합한지 살펴보러 온 아줌마 옆에는 아이 지우가 있다. 지우는 물난리가 뭔지 모른다. “저 다리 건너면 21세기, 여긴 20세기”라고 한다. 세미는 “20세기가 21세기보다 더 좋을 수 있다”며 해맑게 웃는다.

김혜진 작가는 전화 인터뷰에서 “2019년부터 집에 관한 단편을 썼다”며 “이사를 자주 다니기도 했고 또래 친구들과 앞으로 어떤 집에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나누면서 집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 집에 대해 말할 때 평수와 같은 수치로 말하지만 수치화되지 않는 것들,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썼다”고 전했다.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집주인’을 마냥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목화맨션’은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어 마음이 무너져 내린 집주인 만옥과 세입자 순미의 이야기다. 재개발이 될 줄 알고 샀는데 몇년째 미뤄지고 그사이 남편은 걷기 힘들어진다. 당장 돈이 필요한 만옥은 세입자를 내보내는 조건으로 집을 판다. 순미에게 나가달라고 해야 하는데 만옥은 머뭇거린다. “어쩌자고 서로의 사정을 이렇게 속속들이 알아버렸을까 생각했고, 그게 뭐든 차라리 몰랐으면 나았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순미가 이사나가고 나서 몇번의 연락이 오가다 둘의 교류는 결국 끊긴다. 몇년 뒤 목화맨션이 재개발된다는 뉴스를 들은 만옥의 마지막 말에는 스산함이 묻어난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것이 다만 눈에 보이는 저 낡은 주택들만은 아닐 거라고 말이다.”

표제작 ‘축복을 비는 마음’은 집을 둘러싼 노동을 자세히 묘사한다. 입주청소 대행업체 양 사장은 알게 모르게 직원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4명이서 식당을 가면 3인분과 공깃밥 1개를 시키는 그런 사장이다. 사장이 호출해줘야 일감이 생긴다. 인선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유형이다. 인선은 ‘곰팡이 낀 실리콘을 긁어내라고 했을 때’ ‘베란다 천장을 물걸레로 닦으라고 했을 때’ ‘비좁은 세탁실의 줄눈을 솔질하라고 했을 때’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밤에는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고 독한 세제를 써서 가려움증이 피부를 덮쳐오기도 한다. 신입 경옥은 불합리한 사장의 행동을 따지고 추가 근무에 수당을 요구한다. 결국 양 사장 업체를 떠난 경옥과 인선. 경옥은 인선에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집을 청소할 때 마음’을 묻는다. 인선은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하는 거죠, 뭐”라고 답한다.

김혜진은 “소설을 쓰면서 이제껏 지나온 집들에 대해 쭉 생각해보게 됐다”며 “살던 당시에는 몰랐지만 집들에서 받은 것들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살면서 머물렀던 집들의 위로와 축복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는 “집들이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단련시키며 기꺼이 나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집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더 확장한다면 그때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이웃들, 마음들을 한번쯤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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