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 참패 후 대통령의 '나르시시즘'은 더 강해지고만 있다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광장과 녹사평역에 마련된 분향소에 엿새 연속 방문했다. 작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후 윤 대통령은 10월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엿새동안을 국가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분향소는 희생자 위패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아니, 마련될 수 없었다. 위패는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어 그의 혼을 대신하는 상징물이다. 위패도 없는 분향소에 여섯 번이나 찾아간 것이다. 이상한 추모 행위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위패'를 찾았고, 유가족들은 서로를 연결했다. 그리고 추모제를 열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성북구에 있는 '영암교회'를 찾아가 추모 예배를 봤다. 영암교회와 이태원 참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과는 관련이 깊다. 윤 대통령이 어릴 적 다니던 교회라는 것이다. 대통령은 왜 이태원 참사 추모를 위한 공간으로 자신의 어릴적 추억이 담긴 교회를 선택했을까.
대통령의 추모 예배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은 제가 살면서 가장 큰 슬픔을 가진 날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다 저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자신을 위로하는 말을 먼저 한 후, 유가족을 위로하는 말을 한다. 자신 스스로가 가진 '이태원 참사에 대한 슬픔'을 대상으로 한 예배다. 추모가 아니라 고해성사다.
이건 이 정부의 태도를 드러내는 어떤 은유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분한 변화, 단 나만 빼고
윤 대통령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후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로운 변화를 추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차분한 변화는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것이다.
대통령은 취임 100일 때 기자회견을 하고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올해 1월 신년사는 참모진만 배석한 가운데 9분 20초동안 낭독하고 끝났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소통은 취임 500일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취임 100일'에 머물러 있다. '바이든 날리면' 사태로 도어스테핑을 걷어찬 후, 친한 사람들, 생각을 공유하는 집단들과만 '소통'을 즐기고 있다. 물론 그 소통의 중심에는 대통령 본인이 가장 중요하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후 지난달 19일엔 윤 대통령은 참모진에게 별안간 "용산의 비서실장부터 수석, 비서관 그리고 행정관까지 모든 참모들도 책상에만 앉아 있지 말고 국민들의 민생 현장에 파고들어 살아있는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으라"고 지시하더니, 본인은 천태종 본산 구인사를 방문해 "국가와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며 스님들과 점심 공양을 했다. "대선후보 시절인 21년 12월 31일 구인사 행사에서 재방문을 약속"했다는 게 방문 이유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국빈 방문으로 해외에 나갔다가 들어오자마자 26일 박정희 추도식에 참석했다. 27일엔 보수의 심장 경북 안동 병산서원을 방문했다. 대통령실은 유림들과 지역 발전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31일엔 국회 시정연설을 위해 여의도를 들렀고, 대통령의 이 당연한 '책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대통령실은 "역대 최초로 국회에서 상임위원장들과 간담회"를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야당이 추진하는 노란봉투법, 방송법엔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한다.
1일엔 마포구 소재 한 카페에서 60명을 모아두고 비상경제민생회의를 개최했다. 대통령에게 "(카카오 택시를) 강력하게 형사처벌을 좀 했으면 좋겠다"고 건의한 택시기사는 2022년 대선 때 부산선거대책위원회 윤석열 후보 공동선대위원장 출신이다. 대통령의 "은행들이 갑질을 많이 한다"는 발언을 이끌어낸 김포 수산물 제조 소상공인은 "연매출 100억원을 올리는 김포시 소재 중소기업 최고경영자"(더불어민주당 신영대 의원, 7일 국회 운영위원회 발언)이라고 한다.
다음날 대전 대덕 연구개발특구 50주년 미래비전 선포식에 참석한 윤 대통령은 연구자와 대화 시간을 가졌는데, 연구자들이 예산 부족, 장비 부족, 신진 연구자 지원 등을 요구하자 "국가 R&D 예산은 무슨 수당처럼 공평하게 나눠주는 게 아니라 연구자들이 진짜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곳에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R&D 구조개혁은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실태조사를 하며 우선 바구니를 비우고 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구자들의 '민생 현장'을 파악하려 내려간 행사장에서 연구개발 예산을 늘려달란 소리가 나오자 준엄하게 훈계를 한 셈이다.
대통령의 '차분환 변화'는 이런 것이다.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모은 행사장에선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고 싶은 말이 안 나오는 행사장에 가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방식.
무엇이 '변화'라는 것인가. 내년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1.7%로 미국(1.9%)보다도 낮아질 것이다. 일본보다 경제성장률이 뒤지는 것은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경제 운용 주체와 경제 운용 방식을 점검해야 하는 게 상식인데, 들리는 건 경제부총리의 총선 출마 채비와,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의 경제부총리 영전 소리다. 대통령실 대변인은 홍보수석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은 국정원장으로 갈 거란 얘기가 들린다. 인물 쇄신을 하랬더니 측근 승진으로 답한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할 시민사회수석엔 특전사령관 출신이 검토된다.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윤핵관'은 2주만에 옷만 갈아입고 당에 복귀했다.
다시 이태원으로 돌아와 보자. 추모식은 외면하고 본인에게 각별한 의미의 교회에 가서 참모들을 줄줄이 앉혀놓고 "제가 살면서 가장 큰 슬픔을 가진 날"이라고 말하는 대통령. 이건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많은 이들이 지난해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에 대해 유가족을 위로하는 게 '변화의 첫 걸음'이라고 조언했더니 '나의 슬픔이 얼마나 큰 지' 알아달라는 독백으로 돌아온다. 대통령 본인이 슬프다는 걸 사람들이 알 필요는 없다. 대통령이 해야 하는 건 슬픈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다.
취임 500일이 훌쩍 넘었는데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지 않는 것도 '쓴소리'가 나오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이 나올까봐서 아닌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두 번이나 만났다는 데 나눈 이야기는 '박정희를 배우자'였다. 산업통상부 창고에서 50년 전 '수출진흥회의' 자료까지 찾아 읽었다고 한다. TK 방문은 '지지층 결집' 같은 게 아니다. 외부 충격(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에 불안해진 나르시시스트의 새로운 '자아 찾기'다. 지지세가 아직 높은 편인 대구의 재래시장을 방문해 "대통령님 TV보다 실물이 훨씬 보기 좋으십니다"라는 말을 듣고 "칠성시장에 와서 여러분들 보니 힘이 난다"고 말하는 것들은 다 누굴 위한 행보들이겠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바라보다 파멸에 빠진 그리스신화 속 나르키소스는 정치인과 예술인을 빗대는 은유로 많이 쓰인다. 사람들의 칭송을 먹고 사는 권력자는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쉽고, 그것이 과도하면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된다. 과한 자아도취는 자신이 상대보다 더 뛰어나다고 믿으며, 나아가 상대를 적대시하고 중간 지대의 목소리를 배척한다. 한편으로 나르시시즘은 일종의 강한 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자신에 대한 위로를 통해 자신은 틀리지 않았고 여전히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을 강화한다.
대통령은 변한 게 없다. 변화를 추구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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