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시울 붉힌 김시원, 함께 울어준 박성현..강추위 날려버린 '남다른 우정'

김인오 기자 2023. 11. 11. 00: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캐디' 김시원과 '선수' 박성현이 10일 열린 SK쉴더스 SK텔레콤 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친 후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사진=춘천 박태성 기자)

(MHN스포츠 춘천, 김인오 기자)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필드에서 얼음처럼 냉정하던 선수였다. '이별'을 결정하고 후회는 없었다. 또 다른 멋진 인생이 기다리고 있고, 자신도 있어서다.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그 '순간'은 참기 어려워 보였다. 그렇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김시원이 필드를 떠난다. 골프 팬들에게는 김민선5가 더 익숙한 선수다. 그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통산 5승을 채웠고, 한계를 느낀 그 때 은퇴를 결정했다. 간절히 기다리던 첫 우승컵을 안겨준 그 대회, SK쉴더스·SK텔레콤 챔피언십(첫 우승 당시는 ADT캡스 챔피언십)이라 감회가 남다르다.

10일 강원도 춘천에 있는 라비에벨 컨트리클럽 올드코스에서 시즌 최종전 SK쉴더스·SK텔레콤 챔피언십 1라운드가 열렸다. 

이른 아침 대회장을 찾은 김시원은 열심히 야디지북을 체크했다.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꼼꼼하게 표시했고, 1라운드 핀 위치를 표기하며 버디를 머리속으로 그렸다. 드디어 1번홀 티 샷. 그런데 드라이버는 김시원의 손이 아닌 박성현에게 들려있었다.

◇ "캐디가 하고 싶어요."

김시원은 올 시즌 상금 랭킹 89위로 시드를 잃었다. 예년같으면 시드순위전이 열리는 무안에서 클럽을 휘둘러야 하지만 춘천에서 캐디백을 메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캐디빕(캐디가 착용하는 의상)을 한참이나 바라보기도 했다. '캐디 김시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박성현이 10일 열린 SK쉴더스 Sk텔레콤 챔피언십 1라운드 경기 도중 '캐디' 김시원에게 퍼터를 건네받고 있다.(사진=춘천, 박태성 기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성현은 이번 대회에 추천 선수로 출전했다. 1년의 마지막을 고국 무대에서, 그리고 팬들 앞에서 정리하고 싶어서다. 캐디가 필요했던 박성현은 고민도 없이 김시원을 찾았다. 아니 정중하게 부탁했다.

둘은 비시즌이면 여행을 다니고 맛집을 찾으며 1년의 회포를 풀었다. 나이는 박성현이 2살 더 많지만 동갑내기 친구 이상으로 우정을 쌓았다. 성적이 좋았던 해는 축배의 잔을, 한 명이라도 부진했을 때는 위로의 잔을 나눴다. 비록 거창하지 않아도 나눠 질 수 있는 그 순간이 좋았다. 박성현이 캐디를 요청했을 때 1초의 고민없이 'YES'를 외친 이유다. 

이날 박성현은 1오버파 73타를 적어냈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 썩 괜찮은 성적표다. 순위는 공동 11위. 눈만 마추쳐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둘의 호흡이면 남은 이틀 동안 역전 우승도 넘볼 수 있다. 

경기를 마친 후 김시원은 연습 그린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응원하는 선수를 쫓는 갤러리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리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올해 5게임 정도 남겼을 때부터 허리가 너무 아팠다. 골프도 마음처럼 되지 않아 그만할 때라고 느꼈다. 이제 골프 선수 생활을 접으려 한다."

국가대표 출신 김시원은 2014년 KLPGA 투어에 데뷔했다. 루키 해에 첫 우승을 이뤘고, 10년 동안 237경기를 뛰면서 다섯 번이나 우승컵을 들었다. 정규 투어 상금은 27억 5738만원. 1995년생으로 아직 30대가 되지 않았고,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여전히 호쾌한 샷을 구사하는 선수에게 '은퇴'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는 부상. 김시원은 지난해 5월 허리 통증으로 병가를 받고 1년 동안 투어를 쉬어갔다. 복귀를 앞두고 개명을 했다. '골프 한 번 시원시원하게 쳐보자'라는 마음을 담아 김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신통치 않았다. 맘먹은 대로 되지 않자 은퇴를 결정했다. 최고를 찍어본 운동 선수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느끼는 '자괴감'이 거대하게 그를 짓눌렀다.

캐디로 변신한 김시원이 10일 열린 SK쉴더스 Sk텔레콤 챔피언십 1라운드에서 야디지북을 살펴보고 있다.(사진=춘천, 박태성 기자)

김시원은 "골프라는 운동이 싫은 건 아니다. 지금도 그 무엇보다 좋다. 하지만 생각과 현실이 많이 달라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그만할 때가 됐고, 더는 선수로 뛰는 데 미련이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아직 보낼 수 없어. 그래서 축하 인사를 안했다."

때마침 팬미팅을 마친 박성현이 다가왔다. 그는 '캐디 김시원'에 대해 "시원이는 평소에는 유쾌한 친구이지만 코스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하다. 거기에 투어를 오래 뛰었고, 스코어를 줄이는 법을 잘 아는 후배라 큰 도움이 됐다"며 "다만 골프백이 무겁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웃었다. 

김시원의 은퇴 결정에 대해서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아직도 조금 더 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축하 인사를 건넬 수 없다"며 "힘들어도 최선을 다했던 좋은 친구다. 대회가 끝나면 근사한 선물을 줘야겠다"고 말하면서 그 역시 눈물을 애써 참았다.

"전문 캐디를 하고 싶다." 미래 계획에 대해 묻자 김시원은 "지난주에 투어는 은퇴했다. 그래서 이번 대회가 공식적인 캐디 데뷔전이다. 첫 우승 대회라 더 뜻깊다. 좋은 선수가 있으면 도와주는 마음으로 캐디를 맡아보고 싶다. 가능하면 내 성향과 같은 '공격적인' 선수면 좋겠다. 대신 캐디피는 조금만 받겠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캐디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투어를 뛰면서 못 봤던 것도 볼 수 있고, 골프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흥미롭다. 레슨 프로나 미디어 활동은 당분간 생각하지 않고 캐디에만 집중하겠다. 그 이후에 여정은 또 그 때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울며 또 웃으며 한참을 얘기하던 김시원과 박성현은 '화이팅'을 외친 후 골프장을 떠났다. '캐디'는 선수의 호성적을 기원했고, '선수'는 캐디의 앞날을 응원하면서.

김시원과 박성현이 10일 열린 SK쉴더스 SK텔레콤 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친 후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사진=춘천 박태성 기자)

 

Copyright © MHN스포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