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돋보기 너머 또 다른 세상
이 사진을 보면 아흔둘에 돌아가신 영문학자 여석기 선생님이 생각난다. 아흔을 넘겨도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황망했던 따님은 장례를 치르고 집에 가 보니 뜯지 않은 소포 하나가 놓여있더라고 했다. 생전에 아마존에 주문한 책이 도착한 것이다. 채 뜯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뜨끔했다. 평생을 공부하신 92세의 노학자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책을 주문하셨다는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예전에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해서 가을이 되면 학교에서 독서를 권장하는 포스터를 그리고 표어를 짓거나 독후감 쓰기 대회를 했다.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정신적인 가난에서는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오히려 배가 부른 시대가 되니 독서가 뒷전이다. 지식과 정보를 구할 다른 수단이 많아져서인지 책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표어조차 흐지부지되었다.
책을 한 권 읽으면 또 읽어야 할 새로운 책이 생긴다고 했다. 아는 만큼 궁금한 게 더 많아져서 더 많은 책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상투를 틀어 올린 흰머리, 하얗게 서리가 내린 흰 눈썹과 그 아래 두꺼운 돋보기에 선명하게 맺힌 글자, 그리고 멋진 수염과 펼쳐진 책이 빈틈없이 어울리는 노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계절로서 겨울뿐 아니라 인생의 겨울도 잘 준비해야 함을 읽는다. 이제는 자연도, 사람도 자신 속에 침잠해야 할 계절로 접어들었다.
김녕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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