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딸 미국 의사의 뿌리와 정체성 찾기
헬레나 로 지음
우아름 옮김
마음산책
“한국에는 이런 아이를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주변에서 닮아야 한다고 하는 아이. ‘엄친딸’.”
한국에서 태어나 우간다를 거쳐 미국에서 자란 저자는 이 말의 또 다른 뉘앙스를 안다. “다른 아이들이 싫어하는 아이. 그때는 몰랐지만, 언니들과 동생은 나를 싫어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똑똑했고 자매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처럼 의사가 됐다. 한편으로 ‘착한 딸’이었다. 어머니 말에 토를 달 줄 몰랐고, 의학 아닌 문학에 대한 마음을 일찍 접었다. ‘엄친딸’처럼 ‘착한’ 딸도 마냥 좋은 뜻이 결코 아니다. 레지던트 시절을 비롯해 직업적인 생활에서도 종종 질곡이 되곤 했다.
그의 회고록인 이 책의 우리말 부제 ‘미국에서 한국인 여성 의사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절반만 맞는다. 백인 남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두고, 소아청소년과 의사이자 의대 교수였던 그는 2004년 의사를 그만둔다.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은 일에 대한 회의감과 여러 인간적 아픔이 짙은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대학에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한다.
책에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면면이 담겼다. 미국 이민 이후 아버지에게 벌어진 일, 소송을 비롯해 의사로서 경험한 일, 어머니의 자살 시도, 자매들과의 불화, 힘겨웠다는 말로 부족한 지난한 이혼 과정, 뒤늦게 그 상처를 마주한 어린 시절의 일 등을 고루 담아냈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한국을 떠난 부모를 비롯해 가부장제 시대의 질곡 역시 어른거린다.
우간다에서부터 영어를 익히는 게 우선이었기에 그는 모국어를 잃었다. 미국의 한인들에게서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못한다는 비아냥을 듣거나, 반대로 격려를 얻기도 했다. 뒤늦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왕래가 없던 한국의 이모네서 뜻밖의 환대를 받고, 지독히 힘든 시절 한국 드라마를 도피처 삼기도 했다. 쿠바 여행의 계기도 한국 드라마 ‘남자친구’였다. 물론 그는 드라마에 나오지 않는, 드라마와 다른 쿠바의 면면도 이내 발견하지만.
그렇게 ‘나’를 다시 찾아 나서고, ‘나’의 삶을 살아가려는 여정이 담긴 이 책은 그의 삶의 완결편이 아니다. 작가로서 그의 첫 작품, 새로운 출발이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