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진의 민감(敏感) 중국어] 선화혁명
47년 전 베이징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초대 총리가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구차가 천안문 앞 장안가를 지나자 추모 인파가 ‘십리장가송총리(十里長街送總理)’ 정경을 이뤘다. 당시 문화대혁명 10년간 쌓인 불만이 4월 청명절에 천안문에서 폭발했다. 군 통수권이 없던 장칭(江靑) 등 사인방은 ‘반혁명행위’라며 민병과 공안을 동원해 진압했다. 책임을 덩샤오핑 당시 부총리에게 씌워 축출했다. 9월 마오가 죽자 상황이 급변했다. 사인방 타도에 이어 2년 뒤인 1978년 말 당은 천안문 4·5 운동을 완전한 혁명운동으로 복권했다.
리커창은 저우언라이가 아니다. 다만 청렴과 당내 자유파의 대표라는 이미지가 겹친다. 리커창 타계 사흘 뒤 대만의 한 라디오(RTI)가 꽃의 혁명이라며 ‘선화혁명(鮮花革命)’을 처음 언급했다. “리커창으로 인해 중국이 생화의 바다를 이뤘다. 중국의 운명을 바꾸는 한바탕 선화혁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때로는 침묵도 혁명이며, 백지부터 생화까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중국인의 마음이 이미 바뀌었음을 보여줬다”며 “리커창이 중국인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고 했다. 덩위원(鄧聿文) 시사평론가도 ‘선화혁명론’에 동조했다. A4 백지를 온몸에 붙인 청년, 방역 요원 등 상하이 청년들의 핼러윈 행진을 보며 “중국 청년이 정치에 관심을 잊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다.
민심은 쉽게 바뀐다. 리커창을 애도하는 ‘선화혁명’과 상하이의 핼러윈 행진에 당국은 SNS 통제와 베이징 지키기에 주력했다. 훙싱로를 가득 메운 생화 주위에는 푸른 조끼를 입은 감시요원을 세웠고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생화를 말끔히 치웠다.
그럼에도 리커창의 영결식 당일 베이징의 한 대학 캠퍼스 사진이 퍼졌다.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 없다오, 나는 떠나지 않았소.” 영문학자인 고인의 부인이 번역한 ‘천 개의 바람이 되어’로 잘 알려진 추모시였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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