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강화도 침입한 ‘운요호’엔 일본 국기 없었다
[근현대사 특강] 조작된 한국 근대사의 서막
“도적떼 공격” 일본군인 줄 전혀 몰라
문서A의 『일지』 는 함장이 나가사키로 돌아온 다음 날에 바로 작성한 항해일지였다. 이에 따르면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과 광성보 일대에 접근하였다가 초지진으로부터 포격을 받고 3일간 공방전을 벌인 상황을 상세히 담았다. 20일 첫날 운요호는 낮 1시 40분에 보트를 내려 수병 14명이 타고 해안으로 접근하여 두 포대 사이를 오갔다. 4시 22분 보트가 광성보에서 초지진으로 접근하자 포대로부터 포격이 가해지고 5시까지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본선과 보트가 국기를 달았다는 문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둘째 날 운요호는 새벽 4시부터 준비하여 10시 20분에 본선이 초지진 포대로 접근했다. 쌍방 간 포격전이 벌어져 12시 40분 점심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운요호 병사들은 포격전 중 상륙을 시도했으나 조선 포대의 화력이 의외로 강하고 개펄이 깊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후 2시 40분 광성보 쪽으로 가서 상륙하여 시설들을 불태우고 6시 5분에 먼바다로 나와 밤을 보냈다. 이날도 국기 게양에 관한 기록은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셋째 날(22일)은 오전 5시 기상, 5시 55분에 닻을 올리고 방향을 바꾸어 영종도로 접근하여 7시가 지난 시점에 기습적으로 포대를 공격하여 보트로 상륙, 이곳저곳 총질로 위협하고 8시 20분에 철수 준비를 시작하였다. 노획물(총포류 35점, 장비류 20점)을 챙기고 포로 11명을 처리한 뒤 10시 30분 본선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동문 앞 산봉우리 정상에 우리 국기를 날리고”라는 문장이 들어있다.
이 전투는 전날의 초지진 공격 실패에 대한 보복으로 상륙이 가능한 영종도를 택해 해를 등지고 공격하여 분탕질을 친 것이다. 귀국 후 상부에 보고할 거리를 마련하기 위한 기습전이었다. 영종도 포대의 군인이나 일반 주민 500여 명은 이른 아침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햇볕을 마주 바라보는 불리한 상황에서 인근 토성으로 가서 모였다. 이 상황에서 처음으로 언덕진 포대에 국기를 게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토성에서는 식별하기 어려운 먼 거리였다. 영종진 첨사의 사후 보고는 “많지 않은 도적 떼의 공격”이라고 하여 그들이 일본군이란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정황이다.
문서B의 4개 문건은 제목에 운요호 함장 외에 함대 사령관(伊東祐亨), 해군성 대보(大輔, 河村純義), 태정대신(太政大臣, 三條實美) 등 고위 3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10월 8~10일 자로 작성된 것들이다. 상부 지시로 함장이 새로 쓴 『시말서』를 함대 사령관이 받아 9일에 해군성 대보(장관)에게 올리고, 대보는 10일 그것을 태정대신(총리)에게 올린 문건들이다. 고쳐 쓴 『시말서』가 총리대신에게 올려지는 과정에 생산된 문건들이다.
『시말서』의 고쳐 쓴 내용이 문제다. 함장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일지』의 3일간의 일들을 9월 20일 하루에 일어난 것으로 고치면서 처음부터 일본 국기를 단 것으로 내용을 변조하였다. “우리 운요호가 뉴장 해변으로 가는 중에 강화도 근방에 정박하여 음료수를 얻으려고” 단선(보트)으로 포대에 접근하는 데 총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본선이 “항상 게양하는 국기 외에 두 개의 국기를 (더) 달고 세 개의 돛에도 기를 게양하여 보였는데” 계속 공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식수 구하기와 국기 게양은 이 『시말서』에서 처음 나오는 내용이다.
일본 정부는 왜 운요호 함장에게 일지를 『시말서』로 고쳐 쓰게 했던가? 운요호가 강화도에서 조선 측과 충돌한 사건은 당시 일본 신문에 ‘조선사변’이란 제목으로 간단하게 보도되었다. 이에 도쿄 주재 영국, 프랑스 공사관 측에서 일본 외무성에 진상 브리핑을 요청하였다. 이를 위해 운요호 함장의 『시말서』가 급히 만들어졌다. 두 공사에 대한 브리핑용으로 변조된 내용은 순식간에 조선을 국제법을 모르는 야만국으로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가운데 12월에 구로다 기요다카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도쿄 시나가와 항에서 사절단이 출항할 때 각국 외교관들도 나와 ‘야만국’ 조선의 문호 개방에 성공하고 오라고 성원했다.
1876년 1월 18일 강화도 진무영에서 두 나라 대표단이 마주 앉았다. 일본 대표 구로다가 “왜 국기를 단 배에 포격을 가했느냐”고 추궁했다. 이에 조선 대표 신헌은 “그게 너희 나라 배였느냐? 그 배에는 황색 깃발 (자체 경계경보용-필자)만 보였을 뿐 일본 국기는 없었다. 일본 국기를 달았다면 왜 포격을 가했겠느냐? 우리는 외국 표류선에 극진한 도움을 베푸는 나라이다”라고 답했다. 조선 대표의 말이 쏟아지자 구로다는 입을 다물고 준비해온 조약문 초안을 내놓았다. 조선 측은 조정에서 조약문 초안을 검토한 뒤 2주 뒤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국왕이 미리 대표단에 교섭 성사를 지시했기 때문에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직도 잘못 알려진 운요호 사건 진실
운요호 사건은 1874년 5월 타이완에서 발생한 모란사(牧丹社)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태풍으로 타이완에 표류한 류큐인 54명이 모란사 지역 토착민들에게 몰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일본은 류큐를 병합하고 청나라와 류큐 지배권을 놓고 다투던 중이었다. 일본 측은 3600명 병력을 동원해 모란사를 점령하고 추장을 살해하였다. 이로써 청나라와 주권 다툼이 벌어졌으나 영국 중재로 출병이 ‘자국민 보호 조치’로 인정받아 타이완 진출의 교두보를 놓았다. 운요호 사건은 조선에서도 일본에 유리한 사단을 만들어 보려는 술책이란 느낌을 강하게 준다. 사후 음모적인 문서 변조 행위로 조선을 야만국으로 만든 ‘운요호 사건’이 오랫동안 사실처럼 우리 근대사의 서막을 어둡게 드리웠다. 이토 히로부미가 문서 변조를 주도했다는 학설도 나와 있다.
1995년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국회 답변에서 ‘한국병합’은 도덕적 책임은 있어도 법적 책임은 없다고 발언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이 “버르장머리 고쳐 놓겠다”라고 반발하여 무라야마 총리로부터 사과와 함께 제국시대 사료 공개를 약속하여 한·일관계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만들어졌다. 도쿄에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가 설립되어 침략 과정에서 생산된 주요 자료들이 하나씩 공개되기 시작했다. 이 조치 덕분에 방위청 산하 방위연구소 자료실에 깊이 숨겨져 있던 운요호 사건 자료가 필자의 수중에 들어오기도 했다. 한·일 역사문제는 아직까지도 가려진 역사의 진실이 너무나 많다. 사료 발굴과 함께 진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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