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P 4위로 떨어져도 덤덤한 일본 [동아광장/박상준]
성장보다 안정 추구하는 젊은 세대 영향
소소한 행복 추구하는 사회에도 희망 있어
일본이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된 것은 1968년의 일이다. 패전 이후 불과 20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 후로 40년 이상 지켜오던 2위 자리를 2010년 중국에 내주었다. 2000년대 중반에 이제 드디어 회복하는가 싶던 일본 경제가 리먼 쇼크를 계기로 다시 추락하던 때였다. 청년 실업률이 10% 가까이 치솟고 있었고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2위에서 3위로 내려올 때의 일본에 비하면 3위에서 4위로 내려올 때의 일본은 상당히 평온해 보인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잃어버린 20년의 혼란을 딛고 지금은 일본 사회가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 몇 위라는 순위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일본에서 한때 ‘사토리 세대’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한국의 ‘N포 세대’처럼 당시 젊은 세대의 특징을 표현한 말이다. 사토리의 의미가 깨달음이니 ‘깨달은 세대’라는 뜻이다. 돈이나 출세에 욕심이 없고 연애에도 소극적이고 운전이나 여행에도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을 보며 기성세대가 만든 자조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 세대에게 올림픽 몇 등, GDP 몇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일자리는 중요하다. 그게 있어야 소소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치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임금은 그리 높지 않아도 되고, 초고속 승진해 임원이 되지 않아도 된다. 연장 근무는 싫고 휴일 근무는 더욱 싫지만, 정년은 보장되길 원한다. 직장이 안정되지 않으면 삶이 안정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10년에 한 일본인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일본의 GDP 규모가 3위로 내려갔다는 뉴스를 접하고 안도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패전 직후에 태어난 그는 일본 경제의 성장과 함께 자랐다. 내일은 오늘보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커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버블의 붕괴와 함께 성장의 시대가 끝났고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경제에 그의 세대는 좌절했다. 그런데, 뜻밖에 성장하지 않는 경제에서도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는 젊은이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일본이 3위로 내려간 것은 그 젊은이들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낡은 시대가 끝나는 신호일 뿐이다.
그 젊은이들이 바라는 대로 지난 10년간 일본은 일자리와 정년은 늘리고 노동시간은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노동시간의 단축은 일본 기업의 경쟁력을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내는 기업이 늘고 있다. 기업의 실적은 일자리를 늘리는 바탕이 되었고, 일자리가 늘자 사회가 안정되고, 자살률이 떨어지는 등 각종 사회지표가 개선되었다. 취업률이 높아지자 이제는 임금을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본의 임금이 낮은 것은 기업의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임금보다는 고용을 중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고용이 안정됐고, 기업의 실적도 좋아졌기 때문에 임금을 인상하자는 주장에 기업도 반대하지 않는다.
물론 사토리 세대의 모든 면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연애와 결혼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출산율이 오르기 어렵다. 기업은 치열하게 일하는 인재도 필요한데 그런 인재가 부족한 것도 문제다. 일본이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코로나 시기 이전까지는 10여 년간 출산율이 꾸준히 회복된 경험이 있다는 것은 젊은이들이 소소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변화하는 사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을 보면 일본 사토리 세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GDP 규모가, 수출액이, 올림픽 금메달 개수가 세계에서 몇 위인지를 따지고 자랑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큰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우리도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늘리고 정년을 보장하는 식으로 젊은이들이 안정감을 갖고 소소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로 진화해 가다 보면, 더 활기찬 젊은 세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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