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학전 소극장과 김민기
집 정리를 하던 중 오래된 책 사이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1995년 극단 학전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 포스터였다. ‘새로운 계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수고로 실려온다’는 말처럼 30년 전 빛바랜 포스터 한 장으로 겨울을 맞게 될 줄이야. 1998년 외환위기 사태 직후 연변에서 온 선녀는 지하철 1호선에서 고단한 서울의 삶과 만난다. 곰보할매, 빨간바지, 문둥이로 불린 밑바닥 인생들은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를 증명하는 이름이다. 선악 구도도, 딱 떨어지는 클라이맥스도 없이 시끄럽고 단조로운 소음으로 가득 찬 <지하철 1호선>은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몸부림밖에 없었던 이들의 인생, 그 자체였다. 비좁은 객석에 3시간 가까이 앉아 있으면 ‘지하철 1호선’에 탑승해 있는 것 같았다. 궤도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이들의 노래가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였다. 1994년 초연 이후 15년 동안 4000여회 공연되는 동안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지하철 1호선> 무대에 올랐고 시사풍자 뮤지컬의 원조로 평가받았다. <지하철 1호선>이 고단한 시대를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소극장 ‘학전’ 때문이다.
작곡가 겸 가수 김민기는 1991년 사비를 털어 서울 대학로에 ‘학전’을 열었다. 가수 고 김광석, 들국화, 동물원, 안치환이 이곳에서 꿈을 키웠다. 김민기는 2008년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중단한 뒤 어린이·청소년 창작극에 공을 들였다. 동일방직 노조 탄압사건을 다룬 노래굿 <공장의 불빛>도 무대에 올렸다. 그가 1978년 독재 정권과의 충돌을 각오하고 비밀리에 만든 노래 ‘공장의 불빛’은 복사 카세트테이프를 타고 전국에 퍼졌다. <공장의 불빛> <지하철 1호선>이 속칭 ‘대박’이 나자 김민기는 “너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무서웠다”고 했다. 예술을 무기로 독재에 저항했던 그는 자본과의 싸움도 주저하지 않았던 당대의 문화 리더였다. 어쩌면 ‘학전’은 ‘김민기 정신’일 수 있겠다.
‘학전’이 개관 33주년이 되는 내년 3월에 문을 닫는다. 운영난에 김민기의 위암 투병까지 겹쳐 폐관을 결정했다고 한다. <공장의 불빛> <지하철 1호선>을 보며 사회를 배웠던 세대들에겐 희망을, 그 시절을 겪지 못한 이들에겐 용기가 됐던 학전과 김민기. 우리는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구혜영 논설위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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