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객열전] 겁 없는 '슈퍼 루키' 장가연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쫄지 않아요”
모든 스포츠는 승패가 갈리기 마련이다. 선수들은 그 부담감으로 경기를 망치기도 한다. 종목과 상관없이 평상심 유지가 중요하다는 조언이 반복되는 까닭이다. 노장 선수일수록 스스로 심리를 제어하는 데 익숙하다. 반면 나이가 어린 신예일수록 '멘탈'이 무너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당구야말로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 대표적인 스포츠다. LPBA에 혜성처럼 나타난 장가연(19·휴온스) 선수는 천부적으로 강철의 심장을 소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승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이제 갓 대학 새내기가 된 장가연은 어떻게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가 하루 내내 구슬땀을 흘리는 '강차 당구연구소아카데미'를 찾아갔다.
부친 포기한 레슨…'땜질' 입문
스승 권영일 밑에서 7년 수학
경북 구미가 고향인 장가연은 부친 덕분에 당구와 인연을 맺었다. 구미의 대기업에 근무한 부친이 당구 실력을 늘리기 위해 레슨을 신청했지만, 일이 바빠지면서 기한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부친은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딸에게 남은 기간 당구 레슨을 받으라고 권유했다. 경북당구연맹 소속 권영일 선수가 운영하는 당구장이었다.
"정말 별생각이 없었는데 마침 또래의 김하은(현재 서울당구연맹 소속)도 당구를 배우던 참이라 쉽게 어울릴 수가 있었죠. 같이 놀면서 연습도 하니까 좋았어요. 처음부터 아빠가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이왕 당구를 배우면 선수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나 봐요. 여자 선수층이 얇은 편이라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본 거죠. 그래서 기본기 연습을 오래 한 편이에요."
스승 권영일은 시스템보다는 '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스트로크와 자세를 잡는 기본기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팔의 힘을 기르기 위해 1.5㎏의 모래주머니를 한동안 차기도 했다.
"처음 1, 2년은 스트로크 연습과 자세 잡는 법을 중점적으로 연습했죠. 그 후에 대대 수지 15점을 놓고 3쿠션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중학교 졸업할 때는 25점이었고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연습 시간을 늘려 고등학교 졸업할 당시에 30점까지 올라갔어요. 또 지금 키가 165 정도인데 초등학교 때 이미 160이 넘어 신체적인 장점 때문에 실력이 올라간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장가연은 중학교에 진학하고 바로 대한당구연맹 소속으로 등록해 성인부 시합에 출전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전국대회 3위를 차지한 이후 실력이 일취월장으로 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준우승만 4차례나 한 뒤 첫 우승을 일궈냈다. 대한당구연맹회장배 전국대회였다.
"준우승만 할 때 김진아(하나카드) 선수한테 세번 지고 한지은(에스와이) 선수한테 한번 졌는데 첫 우승은 지은 언니를 역전승으로 이겨서 했어요. 기뻐서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막상 우승하니까 눈물이 나오진 않더라고요."
기복 심했던 경기력이 발목
부친이 사준 멘탈 책으로 극복
장가연은 학창 시절 그 흔한 사춘기를 겪지 않고 당구 연습에만 매진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그의 수지는 27점. 학생 신분의 여자 선수로서는 정상권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직 완성형 선수가 아닌 데다 어린 나이 탓인지 경기의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지만,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제풀에 주저앉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차에 그의 멘탈을 완전히 뒤집은 경기가 나왔다. 장가연이 강철의 심장을 보유하게 된 계기였다.
"원래 당구를 시작할 때부터 긴장을 별로 하지 않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때 제법 내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진 순간이 왔어요. 전국대회에서 예선 탈락을 했는데 두 경기 평균 애버리지가 0.2에 불과했던 거죠. 돌이켜보니 상대 선수를 얕보다가 '내가 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쓸데없는 걱정만 하다가 경기를 망친 겁니다. 이후부터 '시합에 질 수도 있는 건데 지면 어때?'라는 마음가짐을 새기는 계기가 됐죠."
부친이 사다 준 멘탈 관련 책도 큰 도움이 됐다. 평소 기복이 심한 경기력을 보고 내심 걱정이 컸던 부친이 잔소리 대신 책을 선물한 것이다.
"평소 아빠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건네준 책을 유심히 읽었습니다. 주로 '내가 잘한 부분을 운이라고 여기지 말고 무조건 실력이라는 자신감을 가져라', '결과가 나쁜 상황은 빨리 잊어라, 단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덕분에 지금은 어떤 상대와 붙어도 절대로 쫄지않을 수 있게 됐죠."
김진아가 LPBA로 넘어간 이후 여자 3쿠션은 한지은과 장가연이 랭킹 1, 2위를 차지하며 양분했다. 장가연의 꿈은 세계선수권 우승이었다. 2위까지 주어지는 세계선수권 참가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다가 코로나19가 터진 거예요. 연맹 결정에 따라 학생 신분인 저는 성인부 대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쌓아 놓은 점수가 많아서 대회만 참가하면 예선 탈락을 해도 2위로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이 가능했는데 자동불참이 되는 바람에 점수가 0이 된 거죠. 결국 순위에서 밀려나 2022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아예 못 나가게 된 겁니다."
세계선수권대회 참가가 아쉬웠던 그는 다음을 기약할지, 새로운 도전에 나설지 고민이 깊었다. 아마추어 세계 여자3쿠션을 평정하느냐, 프로 입문으로 진정한 실력을 평가받느냐의 기로였다.
"쉽게 결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결국 LPBA 도전을 선택했습니다. 연맹은 제가 넘어야 할 선수가 1~2명 정도지만 LPBA는 실력이 쟁쟁한 선수가 넘칠 정도라 프로행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죠. 부모님은 제 결정을 지지해 주셨는데 스승님(권영일)은 처음에 반대가 심했어요. 연맹에서 정상을 누릴 수 있는데 왜 포기하느냐는 거죠. 그래도 지금은 스승님도 많이 격려해 주세요."
장가연은 LPBA 데뷔전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지난 6월 '경주 블루원리조트 PBA-LPBA 챔피언십'에서 챔피언 출신인 임정숙(크라운해태)·강지은(SK렌터가) 선수를 연파하며 8강까지 올라간 것이다. 32강에서 꺾은 최혜미 선수가 지난 11월 8일 'NH농협카드 LPBA 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컵을 거머쥔 점을 감안하면 챔피언 3명을 연달아 제친 셈이다.
'강차 당구연구소'에서 담금질
하루 12시간 연습으로 강행군
장가연은 고등학교 졸업 후 스승 권영일이 추천한 경기 화성시에 소재한 '강차 당구연구소아카데미'로 합류했다.
강차 당구연구소는 절친인 강동궁(SK렌터카)·차명종(인천시체육회) 선수가 의기투합해 설립한 새로운 개념의 당구연습장이다. 24시간 운영하는 유럽식 회원제 연습장으로 상주 직원이 따로 없고 무인화 시스템을 갖췄다. 선수들은 물론 동호인은 일정 회비를 내면 이용이 가능하다. 궁극적으로는 유소년 육성을 목표로 하는데 동호인이 신청하면 레슨도 가능하다.
장가연이 자취하는 집은 이곳에서 1분 거리도 안 된다. 그의 일과는 아침에 짬을 내 등산을 하는 등 가벼운 운동을 한 뒤 오전 10시~11시에 강차 당구연구소로 향한다. 체력 훈련을 위한 헬스장까지 들르면 귀가 시간은 보통 오후 10시~11시. 말 그대로 하루 내내 당구만 치는 연습벌레다.
"강동궁 삼촌이나 차명종 삼촌한테 정말 많이 배우고 있어요. 같이 연습하는 이미래(하이원리조트)·히다 오리에(SK렌터카) 선수한테도 게임 등을 통해 얻는 게 많고요. 데뷔전에서 8강에 오른 것도 당구연구소에 합류한 뒤 실력이 더 늘어난 덕분인 것 같아요. 자신감도 많이 붙었고요."
팀 리그에 합류한 점도 큰 행운이다. 애초 휴온스에 발탁되지 않았지만, 어린 선수들을 육성하는 차원에서 나중에 팀 합류가 결정된 것이다.
"뒤늦게 휴온스로부터 연락을 받고 부모님은 물론 연구소의 두 분 삼촌들께도 막 자랑했어요. 팀에서도 모두 잘 해주시니까 감사할 따름이죠. 김세연·전애린 언니들이 너무 잘 챙겨 주시고요. 특히 최성원 삼촌은 어릴 때 뵌 적이 있어서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같은 팀원이 된 게 무척 신기했어요. 그런데 새로운 팀 리그가 처음에는 부담이었나 봐요. 스트레스도 좀 받고 자신감이 떨어졌는데 팀원들이 도와준 덕분에 잘 극복하고 있어요."
장가연의 유일한 취미는 메이크업이다. 밤 늦게 귀가하면 유튜브 등을 통해 배운 메이크업으로 자신을 가꿔본다. 그 외의 일상은 당구로만 채워지고 있다.
"방통고를 나와서인지 당구계의 선배 언니들이 사실 제 친구나 마찬가지죠. 딱히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사실 메이크업이 취미지만 만약 당구를 하지 않았다면 이쪽 분야에서 일을 했을지도 몰라요. 어쨌든 지금은 당구 선수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올해 시즌 중 우승을 하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죠."
정완주 기자
스포츠한국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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