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래잡기] 사기의 예술

2023. 11. 1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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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갤러리 흔든 위작 사건
진짜 같은 가짜에 깜빡 속아
전청조 허무맹랑 사기 행각
인간의 욕망을 역이용한 것
큰 욕심내지 않고 살아가야

사기꾼 전청조의 지난 행각이 화제다. 저런 20대 젊은이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넘어간 사람이 이리 많나 싶지만, 내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어쩌면 사기꾼이 종종 출몰하는 미술계에서 일해서인 듯싶다. 그중에서도 위작을 둘러싼 추문은 매우 빈번한데, 이미 작가가 죽고 난 뒤 비싸게 거래되는 작품은 언제나 진위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다큐멘터리 '당신의 눈을 속이다'에서 다뤄질 정도로 유명한 미술계 사기 사건이 있다. 1990년대 중반, 부유한 멕시코인이 자신의 아버지가 옛날에 헐값에 산 작품을 조용히 처분하고 싶다며 미국 뉴욕에서 160년이라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권위 있는 노들러갤러리와 접촉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가 보내온 1950년대와 1960년대 추상표현주의 대가의 미공개 작품은 무려 14년 동안 노들러갤러리 디렉터였던 앤 프리드먼의 중개를 거쳐 유력 인사에게 대거 판매됐다. 그중 한 구매자가 작품의 진위를 공개적으로 추궁하며 불거진 진실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 '무제 1956'.

60대 중국인 화가가 뉴욕 변두리에서 반세기 전에 성행한 추상표현주의 형식의 작품을 만들고, 또 다른 사기꾼이 이를 오래된 것처럼 재가공한 후 갤러리에 접근한 것이었다. 프리드먼이 유력한 컬렉터와 기관에 판매한 작품 60여 점이 총 8000만달러에 육박한 사실이 밝혀져 줄소송이 이어졌으며, 대부분은 합의 조정이 되었으나 한 건은 기어코 2016년 법정까지 갔다.

당시 법정의 중심에는 마크 로스코의 위작이 걸려 있었다. '무제 1956'은 검은색과 붉은색 사각형이 화면 안팎으로 숨 쉬는 듯한, 로스코의 대표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숭고'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로스코의 작품은 오로지 두세 개의 색면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화와 철학, 심리학과 신학까지 공부한 로스코는 "희열을 느낄 정도로 비극적인 경험만이 예술의 원천"이라고 할 만큼 무의식적으로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제작하는 데 몰두했다. 그래서인지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 앞에서는 심장이 빨리 뛰거나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이 많을 만큼 그의 작품은 큰 사랑을 받는데, 전문가까지 넘어갈 정도로 정교하게 작품을 위조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작품은 누가 보더라도 탄성을 자아내게 했으며, 로스코 전문가로 여겨지는 이들도 재판 전에는 출처에 고개를 갸웃해도 작품 자체는 위작이라고 판정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었다고 한다. 진짜 같은 가짜였던 것이다. 사기꾼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즉 상대방을 파악하고 그가 원하는 부분을 채워줄 것처럼 행동하는 점이 바로 사기꾼의 재능이다. 결과적으로 사기꾼에게 당한 많은 로스코 전문가는 수익도 좋았겠지만, 그보다도 미술계에서 자신이 '특출한 눈'을 가진 권위자라는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더 큰 욕망 때문에 출처가 너무나 의심스러웠지만 심층 조사 없이 넘어가 버리는 인지 부조화를 겪었던 것이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옆에서 하나둘씩 괜찮다고 말하면 '아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오히려 이 작품이 위작이라는 점에 더 놀랐고, 아직까지도 프리드먼은 자신도 사기 사건의 피해자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들러갤러리는 결국 문을 닫았고 프리드먼의 명성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백만 달러의 사랑'부터 최근까지 이어지는 '오션스' 시리즈 등 많은 영화가 그럴싸한 위작을 진짜와 바꿔치기하는 미술품 사기꾼을 표현할 때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멋쟁이처럼 그린다. 실제라면 그런 사람은 많은 이에게 손해를 끼치는 중대한 범죄자일 뿐이다.

금전적 문제를 떠나 오랜 기간 공들여 쌓아온 경력과 명성을 노리고 사기를 계획하는 것은 누군가의 삶을 부정해 버리고 마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으니 결국 우리가 더 조심스럽게 욕심내지 않고 살아갈 수밖에 없나 보다.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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