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과 기각 사이 ‘조건부 구속’, 언제쯤 도입될까
“보복범죄·증거인멸·특혜 위험 크다” 번번이 무산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구속하기 위해선 법원의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를 거쳐야 한다. 법원이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피의자를 심문하는 절차다. 영장실질심사는 1997년 처음 도입됐다. 이전에는 법원이 검찰의 수사기록만 보고 영장 발부를 결정했다. 영장실질심사 도입은 피의자의 기본권 신장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구속제도의 개선 흐름 속에서 자주 등장한 방안이 ‘조건부 구속’(조건부 석방)제도다. 다소 생소한 용어일 수 있겠지만, 20여 년 전부터 도입 필요성이 논의됐다. 현재 법원은 구속영장의 발부나 기각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반면 조건부 구속은 구속영장을 발부하되, 거주 제한 등의 조건을 달아 석방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중간지대를 신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건부 구속제도는 만연한 ‘구속 만능주의’ 실태를 개선하고 형사사법의 대원칙인 무죄 추정과 불구속 수사 원칙을 구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는다. 반면 보복범죄와 증거인멸의 위험을 차단할 수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 실효성과 필요성이 낮다는 반론이 맞선다.
■조건부 구속과 영장항고 한 묶음으로
현재 피의자가 구속되면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 수집 등의 방어권 행사가 불구속 상태일 때보다 현저히 제한된다. 또 생계 등을 위한 모든 사회생활이 중단돼 상당한 타격을 받는다. 반면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수사기관 입장에선 증거인멸과 도망 등이 우려스럽다. 구속영장 발부와 기각이라는 ‘모 아니면 도’ 방식의 이런 구조가 적절한지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나온 게 조건부 구속이다.
조건부 구속은 피의자를 구속하지 않는 대신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거주 제한, 사건관계인 접촉 제한, 보증금 공탁, 차량 운행 제한 등의 조건을 부여한다. 사건의 특성과 개별 피의자의 상황 등에 맞춰 다양한 결정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 피의자가 조건을 어기면 구속이 집행될 수 있다.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면서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명시된 무죄 추정 원칙과 불구속 수사 원칙을 실현하는 데 기여한다. 동시에 구속 외의 수단으로 증거인멸 등을 방지할 수 있어 구속의 목적을 달성하는 효과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피의자의 기본권과 수사기관의 수사상 필요를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수사기관이 피의자 구속에 목매는 실상과 영장재판을 본안재판처럼 여기는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란 평가도 있다. 김정환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설명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관심이 많은 사건에서 구속 여부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정작 본안재판의 결과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속되면 마치 유죄를 받은 것처럼 바라본다. 바람직하지 않다. 구속의 본질은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의 출석과 관련 증거를 확보하고, 형 집행을 담보하는 등 절차상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조건부 구속제도가 도입된다면 이런 현상이 완화되면서 구속이 본질에 맞게 운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김 교수는 지난 4월 사법정책연구원 등이 주최한 ‘구속제도의 개선 방안’ 학술대회에서 조건부 구속의 필요성 주제로 발표하기도 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도 그간 제도 도입에 찬성하는 입장을 밝혀왔다. “조건부 석방 제도가 현재 인신 구속제도의 한계 및 문제점을 보완해 불구속 수사 원칙을 확대함으로써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면서도 피해자 보호도 꾀할 수 있다. 구속이 수사 성공 여부의 가늠자로 인식되는 현실을 개선해 형사사법 절차의 중심을 구속재판에서 본안재판으로 이전함으로써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조건부 구속과 함께 ‘영장항고’ 제도를 함께 도입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온다. 영장항고제는 검사나 피의자가 법원의 구속영장 심사 결과에 불복할 수 있는 수단이다. 항고를 통해 상급 법원에 다시 판단을 맡기는 것이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도 조건부 구속과 함께 영장항고를 시행 중이다. 현재도 법원의 구속 결정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 조건부 구속이 도입되면 다양한 선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구속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 있다.
김정환 교수는 “구속에 조건을 넣게 되면 법원의 재량권이 확대되고 그러면 법원이 자의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비판이 더 커질 수 있다”라며 “구속영장 결과에 항고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를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급 법원에서 판단을 하고 이런 결정이 쌓이다 보면 구속 기준이 안정적으로 정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항고는 조건부 구속영장에만 국한하지 않고, 발부와 기각 등 모든 결과가 항고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1999년부터 등장했지만 번번이 무산
조건부 구속제도는 그간 사법제도 개선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이뤄질 때마다 줄곧 거론됐다. 1999년 대통령직속 사법개혁추진위원회는 석방제도의 개선 방안 가운데 하나로 구속영장 단계에서 보석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2005년 대법원 산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가 구속제도를 개편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정부가 2006년 1월 이를 국회에 제출했다. 여기에도 조건부 구속 방안이 담겼다. 구속영장이 청구되면 법원은 우선 구속 사유가 없으면 기각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이어 석방을 조건으로 구속을 대체할 수 있을 때는 조건부로 구속을 유예하거나 피의자를 석방하는 결정을 해야 한다. 마지막 수단으로 구속영장 발부를 선택하도록 했다. 개정안에는 영장항고제도 함께 포함됐다. 검찰은 그러나 영장항고제만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 2017년 대법원 형사사법발전위원회에서 같은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대법원 사법행정자문회의가 2021년 9월 조건부 구속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사법행정자문회의 내 재판제도분과위원회는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조건을 담는 방안을 제시했다. 석방 이후 조건을 위반했을 때 바로 구속을 집행할 수 있어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는 등의 절차를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꾸준히 발의됐다. 20대 국회에서는 2018년 9월 장제원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과 2019년 8월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특히 장 의원은 “그간 검찰은 구속을 범죄수사의 수단 또는 재판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목표로 인식해 구속 위주의 수사관행을 반복하고 있다”라며 “이는 피의자의 신체 자유를 제한하고 검찰과 피의자 간의 정보 불균형 등으로 피의자의 실질적 방어권 보장을 어렵게 하는 문제점이 있다”라고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현재 21대 국회에서도 조응천·박주민·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2년 9~11월 발의한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지난 11월 8일 “향후 국회에서 관련 법률안들이 논의되는 경우 의견을 적극 개진할 예정”이라고 주간경향에 밝혔다.
반면 법무부와 검찰은 조건부 구속제도 도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해왔다. 법무부는 지난 11월 8일 주간경향의 질의에 “조건부 석방으로 보복범죄와 증거인멸을 막기 어렵다”라며 “석방 여부와 조건이 기준 없이 판사에게 일임돼 권력층에 대한 특혜 논란 소지가 크다”라며 반대 견해를 재확인했다. 판사의 재량이 늘어나면서 유능한 변호인을 선임할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법무부는 특히 피의자가 석방의 조건을 어기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피해를 사후적으로 되돌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법무부는 “판사가 부과하는 주거지 제한, 사건관계인 접촉 금지 등의 석방 조건을 피의자가 위반해 재구속 등의 제재를 받더라도, 보복범죄와 증거인멸로 이미 발생한 인적·물적 피해와 실체적 진실 규명의 지장은 회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앞으로 조건부 구속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이러한 우려를 차단하기 위한 장치 마련이 수반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수사 단계에서 장기간 구금을 허용하는 미국, 독일, 프랑스 등과 달리 한국은 구속기간이 최장 30일에 불과하다는 점도 반대 주장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또 체포·구속 적부심, 구속 취소, 보석 등 다양한 석방제도가 마련돼 있어 조건부 석방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법무부는 밝혔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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