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안나가 없었다면 '죄와 벌'은 존재할 수 없었다

허연 기자(praha@mk.co.kr) 2023. 11. 1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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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속기사이자 부인이었던 출판인
안나 스니트키나 (1846~1918)

도스토옙스키는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평범치 못한 성품이, 도박중독이 그를 늘 위태롭게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반역죄로 몰려 사형 직전에 사면된 적도 있었으며, 유배생활을 한 적도 있고, 도박중독에 빠져 폐인이 되기도 했으며, 빚에 쪼들려 소설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적도 있었다. 여기에 형제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운명도 늘 그를 괴롭혔다.

그런 도스토옙스키를 역사에 남는 대문호로 만든 한 여인이 있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라는 여인이다.

안나는 학창시절부터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열렬히 좋아하는 문학 소녀였다. 친구들은 그녀를 '네토츠카 네즈바노바'라는 도스토옙스키 초기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아예 '네토츠카'라고 부르곤 했다.

안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출판사와의 마감 약속을 못 지켜 모든 저작권을 몰수당할 위기에 처한 도스토옙스키의 속기사를 자청한다. 1866년 '도박꾼'과 '죄와 벌'은 그녀의 손에서 완성됐다. 도스토옙스키가 빠른 속도로 구술을 하면 그녀가 이것을 받아 치고 나중에 다시 정서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총명함과 열정에 반한 도스토옙스키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안나는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46세, 안나는 21세였다.

그녀는 경제적 곤궁과 도박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던 도스토옙스키를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창작에 열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빈대처럼 들러붙어 있던 형제들과의 관계를 정리한 것도 그녀였다.

안나는 직접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출판사와의 계약에 매여서 자유로운 창작을 못하자 내린 결정이었다. 안나가 직접 책을 출판하고 판매하며 도스토옙스키는 연이어 명작을 쓸 수 있었다.

고생 끝에 안나는 스타라야루사라는 지방도시에 2층짜리 주택을 지어 이사를 했다. 현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으로 쓰이는 바로 그집이다.

안나는 단순한 출판인이 아닌 도스토옙스키 문학을 진정으로 사랑한 독자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죽었을 때 그녀는 겨우 35세였지만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그의 글과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그녀의 순정은 대단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죽자 큰돈을 주고 출판사를 인수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도스토옙스키가 상업적으로 악용되는 게 싫다며 응하지 않았고, 아예 출판사 문을 닫아 버렸다. 죽기 전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이야기를 담은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의 일기'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이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안나가 없었다면 도스토옙스키는 문학사에 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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