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올 거라는 희망, 기다리며 사는 게 우리 모습”

이태훈 기자 2023. 11. 10. 11:4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신구·박근형·박정자·김학철
/파크컴퍼니

“초봄부터 얘기는 됐는데 상당히 주저했어요. 에스트라공이 무대에서 움직이는 걸 따라갈 수 있을까, 그 많은 대사를 외울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하지만 내가 마지막 기회인데, 내 진을 빼서 전부 토해낸다면 극복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과욕을 부렸습니다.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9일 오전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 간담회, 배우 신구(87)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급성 심부전으로 심장박동기 수술을 받고도 다시 무대로 돌아와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는 지난 9월 연극 ‘라스트 세션’ 공연을 마쳤을 때보다 훨씬 혈색 좋고 건강해 보였다. 그는 내달 무대에 오를 ‘고도’에서 ‘에스트라공’ 역을 맡았다. 이제 두 달의 공연기간 동안 ‘블라디미르’ 역의 박근형(83)과 함께 무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파크컴퍼니

◇박근형 “서로 눈빛만 보고도 척척”

목줄을 맨 짐꾼 ‘럭키’ 역의 박정자(81), 럭키를 노예처럼 부리는 지주 ‘포조’ 역의 김학철(64)까지 한 작품에 함께 출연하는 것만으로 화제가 됐던 배우들. 한창 연습이 진행 중인 이들의 표정이 확신으로 밝게 빛났다.

박근형 배우가 “너무 운 좋게 얻어걸렸다”고 운을 떼자 폭소가 터졌다. “옛날부터 어떤 역이든 꼭 하고 싶은 연극이었어요. 젊었을 때 기회를 잡았어야 하는데 다 놓치고, 1년에 한 편은 연극하겠다는 약속도 못 지키고 있었는데. 선생님들과 같이 하니까 눈빛만 보고도 원하는 걸 척척 전달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스타일리시하고 눈빛에도 힘이 넘친다.

“자꾸 신구 선생님 건강을 걱정하시는데, 연습할 때 보니 뛰어다니시고 잡아댕기고 다 하니깐요. 지금은 너무 건강하세요. 걱정하실 거 하나 없는 것 같습니다!”

/파크컴퍼니

◇박정자 “매 순간이 감동이자 도전”

무대 위 카리스마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배우 박정자가 주역이 아닌 조연으로 이들과 함께 무대에 선 것에도 모두가 놀랐다. 박정자는 “프로듀서도 연출자도 럭키라는 배역에 나를 캐스팅하지 않았다. ‘내가 럭키할게’ 하고 손을 든 것”이라고 말했다. “극단 산울림의 ‘위기의 여자’ 때도 연출가 임영웅 선생이 여배우를 고민하실 때 손 들고 ‘박정자는 안 되겠습니까’ 했었어요. 처음엔 ‘박정자는 거리가 멀다’ 하셨지만 결국 제게 배역을 맡겨주셨고, 성공시켰습니다.” 그는 “이번 ‘고도’, 저도 60년 넘게 연극을 했지만 두 분 선생님 빛나는 연기 보면서 매 순간이 감동이고, 내게 큰 도전이 된다”고도 했다. “사실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기만 하지 만나지는 못하지요. 하지만 럭키 역할을 하면서 제 마음 속에서 저는 고도를 만났구나 생각합니다. 그런 꿈과 목표, 포부를 갖고 럭키를 할 겁니다. 이런 시간이 또 있을까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파크컴퍼니

◇김학철 “포조는 내 운명… 캐스팅 소식에 눈물이 핑”

자기 색깔 뚜렷한 배우 김학철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64년 만에 드디어 막내가 됐다”고 말을 시작했다. “제가 막내로 태어났는데, 64년이 지나고 다시 연극의 막내가 된 지금, 정말 황홀합니다. 저는 포조가 제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캐스팅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며 “신구, 박근형, 박정자 선생 뒤에 내가 낄 수 있나, 자격이 있나, 망신 당하면 어떡할까, 이런 긴장은 처음이었다”고도 했다. “연습하면서 몇 차례 도망가고도 싶었습니다. 만만치 않구나. 처음 박정자 선생님 목에 밧줄을 걸어 드렸을 때는 송구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제 노예같습니다.” 박정자 배우를 포함해 참석자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극중 고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유일한 인물 ‘소년’을 맡은 김리안 배우는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선생님들의 고도를 가장 많이 목격하는 역할로서, 그 목격하는 과정 중에 가장 가까운 정답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연습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9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간담회에 참석한 창작진. 왼쪽부터 오경택 연출, 배우 신구, 박정자, 박근형, 김학철, 김리안. /뉴스1

◇오경택 연출 “보편적 인간 이야기… 선택에 자신”

원작에서 남자 배우의 역할인 ‘럭키’를 박정자, ‘소년’을 김리안에게 맡긴 한국 ‘고도’ 첫 여성 캐스팅에 대해 오경택 연출은 “처음 박정자 선생님이 럭키를 하겠다고 하셔서 저와 제작자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너무 좋을 것 같았고 한 번도 못해본 도전이 될 것 같았다”고 했다. “이 공연의 역사를 살펴보니 1980년대 특히 유럽 쪽에서 여성 극단의 연기 시도를 원작자 베케트가 계속 반대했어요. 극중 블라디미르가 방광염을 앓으면서 수시로 밖에 나가 소변을 보고 오는데, 여성은 전립선이 없으니 이 연극을 할 수 없다는게 베케트의 말이었죠. 실제로 네덜란드 한 여성극단과는 소송까지 가기도 했고요. 하지만 베케트 사후에 끝난 그 소송에서도 극단이 이겼고, 1992년에는 한 프랑스 극단이 아비뇽 축제에서 모든 배역에 여성을 캐스팅한 ‘고도’로 큰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 연출은 “이건 인간의 보편적 이야기이며 작품 자체의 보편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며 “역할을 가장 잘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를 캐스팅했고, 연습하면서 우리 선택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일종의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고도는 도대체 누구 혹은 무엇일까. 신구는 “고도는 실존하지 않는다. 오늘은 못 보지만 내일은 볼 거라 생각하며 기다림을 이어가는 두 방랑자의 모습, 그게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모습 같다”고 했다. “이 작품 하면서 더 간절하게 접근이 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건 희망이거든요. 에스트라공은 늘 ‘가자’ ‘죽자’ ‘목매자’고 하지만, 블라디미르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기다리자, 기다리면 온다’고 달래죠. 그래도 오지 않는 것이 고도이고 희망이고. 그게 신인지 혹은 자유인지 모르겠지만 기다리고 사는 겁니다.”

공연은 12월 19일부터 서울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파크컴퍼니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