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9. 우산도(울릉도)에 간 삼척사람 김인우 안무사-동해 바닷속 해산(海山)이 되다

최동열 2023. 11. 1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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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 서면 태하리 해변. 조선시대 동해안에서 파견된 안무사, 수토사 등이 가장 먼저 닿은 해변이다.

■김인우·이규원·안용복 해산-해저 지명 등재

-김인우는 주민 쇄환 위해 울릉도에 간 안무사

육지의 산, 고개, 분지, 평야 등에 모두 이름이 있듯이 바다의 지형지물에도 이름이 존재한다. 자국의 언어로 된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주권이나 국력, 국가의 위상 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세계 각국은 육지는 물론 바다의 지형지물에도 자국 이름을 붙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07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해였다. 모나코에서 열린 제20차 국제해저지명소위원회(SCUFN)에서 우리가 명명한 동해 해저지명 10곳이 국제해저지명집에 등재된 것이다. 당시 등재가 확정된 우리 이름의 동해 해저지명은 강원대지, 울릉대지, 우산해곡, 우산 해저절벽, 온누리 분지, 새날분지, 후포퇴, 김인우 해산, 이규원 해산, 안용복 해산 등이다. 동해 바다 속에 우리 이름을 가진 해저 지명 10곳이 한꺼번에 국제통용 명칭으로 등록됐다는 점에서 국제해저지명소위원회의 결정은 크게 주목을 끌었다.

▲ 호조참판 박습의 천거로 김인우를 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아 파견했다는 내용을 담은 조선왕조실록 기록.(태종 16년 9월조/국사편찬위원회)

그런데 여기서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이 사람 이름을 딴 해저지명 세곳(김인우 해산, 이규원 해산, 안용복 해산)이다. 다들 주지하다시피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 어부들의 출어를 금지할 것을 요구, ‘두 섬, 즉 울릉도와 독도가 이미 당신네 나라(조선)에 속해 있다’는 서계를 받아오고, ‘도해금지령’까지 이끌어낸 영웅적 인물이기에 더 이상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규원은 1882년 조선 조정이 울릉도에 파견한 검찰사(檢察使)로, 선원과 포수 등 102명의 대규모 조사단을 이끌고 4월29일부터 5월13일까지 14일간 울릉도를 조사한 뒤 “개척이 가능해 주민 이주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한 인물이다. 이규원 검찰사의 현지 조사를 토대로 그해 울릉도에 다시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개척령이 반포되고, 이듬해인 1883년부터 주민 이주가 본격화되니까 근대 울릉도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김인우(金麟雨)는 누구인가. 안용복이나 이규원에 비해 매우 생소한 인물이기에 더 눈길을 끈다. 김인우는 울릉도 주민 쇄환 등의 임무를 맡아 1416년(태종 16년)과 1425년(세종 7년)에 두 차례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돼 울릉도에 들어갔던 삼척 사람이다.

■우산무릉등처안무사-‘등처(等處)’는 독도 포함

-태풍으로 선군(船軍) 등 희생 막심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당시 김인우의 행적이 기록돼 있는데, 울릉도까지 항해의 여정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태종실록에는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을 바쳤다. 또 그곳에 살던 주민 3명을 데리고 왔는데, 섬에는 15호에 남녀를 합해 86명이 거주민이 살고 있다고 했다. 김인우가 섬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두 번이나 태풍을 만나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 안무사 김인우가 무릉도에서 돌아와 토산물 등을 바쳤다는 기록.(태종 17년 2월조/국사편찬위원회)

또 김인우의 두 번째 울릉도 행을 기록한 세종실록에는 ‘안무사 김인우가 부역을 면하기 위해 울릉도로 갔던 남녀 20명을 수색해 잡아 와 아뢰기를 처음 병선 2척을 거느리고 무릉도에 들어갔는데, 선군(船軍) 46명이 탄 배 한 척이 바람을 만나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임금께서 김인우가 20명을 데려왔으나 40여명(선군을 지칭)을 잃었으니 무엇이 유익하냐고 한 뒤 병조에 명을 내려 데려온 20명을 충청도의 깊고 먼 산골 마을로 보내어 다시 도망하지 못하게 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실록의 내용을 살펴볼 때 김인우는 처음에는 항해 중에 태풍을 만나 그 자신이 겨우 목숨을 건졌고, 두 번째는 수행원 46명을 태웠던 배 한 척을 아예 폭풍에 잃고 돌아왔다. 범선에 의지해 울릉도로 가는 뱃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김인우의 두차례 울릉도 행을 통해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라는 김인우의 당시 직책이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그냥 우산 안무사나 무릉 안무사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등처(等處)’라는 용어를 썼는가에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흔히 등처라는 표현을 쓸 때는 ‘그곳 외에 여러 곳’이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돼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삼은 것은 독도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김인우가 안무사로 발탁된 배경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는 당시 호조참판 박습(朴習)에 의해 천거된 것으로 실록에 기록돼 있다. 박습은 김인우가 울릉도로 1차 항해를 하기 1년 전인 태종16년(1416년)에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박습은 “신(臣)이 일찍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들었는데, 섬으로 들어가는 길이 매우 협소하다”는 요지로 임금(태종)에게 울릉도를 설명한 뒤 “그 섬을 아는 자가 삼척에 있으니 청컨대 그 사람을 시켜서 섬에 가 보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이에 임금이 박습의 말이 옳다고 여겨 삼척사람으로 전(前)에 만호(萬戶) 벼슬을 지낸 김인우를 불러 무릉도의 일을 묻자 김인우가 울릉도 등지의 사정을 자세히 고하기에 무릉등처안무사로 삼았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 무릉도 입도 때 배가 파선되어 죽은 강원도 수군의 초혼제를 지내도록 했다는 기록.(세종 7년 11월조/국사편찬위원회)

울릉도로 가는 사람을 천거하는데,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의 진언이 그대로 수용되고, 또 만호 출신의 삼척사람을 울릉도 순찰의 적임자로 발탁하는 것 등을 살펴봐도 조선시대에 삼척 등 동해안 지역이 울릉도와 얼마나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는지 능히 알만하다. 최동열 강릉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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