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걸어놓고 보는 자연’... 韓 현대미술 거장 박서보 마지막 숨결, 160년 전통 佛 도자기에 담겼다

유진우 기자 2023. 11. 1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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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라하는 요리사는 본인 요리를 생명체 같이 여긴다. 마치 신처럼 여러 재료를 이용해 요리에 본인이 숨을 불어 넣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요리를 올리는 접시 하나 허투루 고르는 법이 없다. 도화지가 화가에게 또 다른 세계이듯, 접시는 요리사에게 대지(大地)다.

베르나르도(Bernardaud)는 160년 전통 프랑스 포셀린(도기·陶器) 브랜드다. 1863년에 설립 이후 프랑스 엘리제궁과 미쉐린가이드에 오른 스타 쉐프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도 톡톡과 강민철레스토랑, 라미띠에 같은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이 베르나르도 제품을 사용한다. 이들에게 베르나르도는 단순하게 요리를 담는 그릇을 넘어 본인 요리 세계가 펼쳐지는 소우주(macrocosm)다.

베르나르도 역시 스스로를 그릇 만드는 회사 이상이라고 여긴다. 기술을 보존하기 위해 도자기 장인들을 파견해 도자기 학교와 디자인 학교 학생들을 가르친다. 콜베르 위원회(Comite Colbert)에도 1962년부터 합류했다. 콜베르 위원회는 창조성과 품질을 중시하는 프랑스 고급 브랜드 모임이다. 에르메스와 샤넬, 디오르, 루이뷔통, 겔랑 같은 브랜드가 여기 속해있다.

콜베르 위원회에 속한 여느 브랜드들처럼 베르나르도는 매년 유명 디자이너 혹은 아티스트와 협력해 새 에디션을 발표한다. 마르크 샤갈과 호안 미로, 제프 쿤스 같은 거장들이 베르나르도 식기를 거쳐갔다.

베르나르도는 올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단색화 거장 고(故) 박서보 화백과 협업했다. 베르나르도가 프랑스 도기를 대표한다면, 박서보 화백은 한국 미술사를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박서보 화백은 일제강점기 1931년에 태어나 1950년대 전위적인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다. 앵포르멜은 칸딘스키 같은 추상화 작가들이 지녔던 이성과 차가운 느낌에서 벗어나 서정과 감상, 색채 중심으로 표현한 추상화 움직임을 말한다.

1970년대 초부터는 ‘묘법’이라 불리는 무채색 단색화 작업을 해왔다. 그의 말을 따면 단색화(monochrome)는 “스님이 온종일 목탁을 두드려서 참선의 경지에 들어가듯”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반복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 작업이다.

세계 현대미술 시장에서 단색화는 10여 년 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해, 지금은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장르이자 주류(主流)로 자리 잡았다. 이제 미술계 큰손들은 단색화를 모노크롬이라는 영어 단어 대신 ‘단색화(Dansaekhwa)’라는 우리말 고유명사로 부른다. 박서보 화백 이름 역시 현재 이우환, 김환기 같은 우리나라 대표 작가들과 함께 미술 거상들이 수집 목록에 올리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날 박서보 아티스트 에디션 발표를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베르나르도 5대 계승자 미셸 베르나르도(Michel Bernardaud)는 “베르나르도는 그간 여러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진행했지만, 이번 에디션이 그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큰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며 “프랑스 현지 공방에서도 자랑스러운 성취로 여겼다”고 말했다.

그래픽=정서희

박서보 아티스트 에디션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최고급 식기를 만드는 브랜드가 박서보 화백 그림을 도기로 옮겨낸 작품이다.

단색화는 한가지 색(色)만 사용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비슷한 여러 색이 미묘하게 농도와 질감을 다르게 해 반복된다. 수집가들 시선을 사로잡는 깊이감이 여기서 나온다.

“단색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색이야.
색에 정신의 깊이가 담겨야 해.

예컨대 내 거무스름한 그림은 그냥 검은 색과는 달라.
평생 부엌에서 나무를 때고 밥을 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렸어.
그 연기가 수십 년 쌓여 천장과 벽, 서까래에 거무스름한 자국을 남겼지.

그 색을 그림에 담은 거야.”

박서보 화백, 2022

미셸은 박서보 화백 생전에 수차례 한국을 찾아 이번 작품에 대해 논의했다. 베르나르도는 원작이 가진 섬세한 선을 부조로 충실하게 재현하고, 화백이 추구한 색채가 가진 힘을 도기에 담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종이가 품은 빛깔을 도기로 나타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박서보 화백은 결과물을 수차례 반려했다. 협업은 팬데믹 시기 내내 이어져 3년을 넘겼다.

미셸은 “박서보 화백 작품이 띈 색감과 정교한 기술을 도자기로 구현하기 위해 3년 동안 노력한 결실이 드디어 나와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제작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박서보 화백이 함께하지 못해 슬프다”며 “박서보 화백과 협업한 아티스트 에디션이 더 많이 알려질 수 있도록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등 글로벌 시장에까지 열심히 알리겠다”고 말했다.

이번 박서보 아티스트 에디션은 두 가지 색으로 출시했다.

박서보 화백은 작품에 관념적인 색이 아니라 자연이 가진 색을 담았다. 자연이 가진 치유의 힘을 작품을 보는 모든 이가 느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과정을 ‘그림 속으로 색을 유인한다’고 표현했다.

베르나르도와 손잡고 선보인 첫 번째 ‘묘법 No.1-23′은 박서보 화백이 제주도에서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하늘과 바다 색을 섞어 만든 작품이다. 작품을 마친 후, 그 앞에서 숨을 깊게 들이 마시는 작가 본인을 발견하고 이 색을 ‘공기(空氣)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묘법 No.2-23′은 올리브에서 영감을 받았다. 박서보 화백은 생전에 와인을 좋아했다. 그는 어느 날 선물로 받은 잘 익은 올리브를 와인과 처음 먹고서 어릴 때 서있던 보리밭이 떠올랐다고 한다. 올리브 색은 ‘수확의 색’, 즉 뿌린 것을 거두는 계절의 색을 뜻한다.

두 작품은 오로지 99개씩만 만들었다. 작품 하나 당 가격은 3000만원을 호가한다. 다소 비쌀 수 있는 가격임에도 99개 가운데 국내에 먼저 배정한 30개는 순식간에 팔렸다. 현재 추가로 들어온 20여개 제품만 남았다.

이유진 박서보재단 이사는 “이번 아티스트 에디션은 베르나르도가 국내 아티스트와 처음으로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사례”라며 “뜨거운 가마 안에서 나온 도자기에 선생님 작품 색이 온전하게 살아있도록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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