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벚꽃의 나라’와 손잡아라…미국이 떠받든 지정학 바이블

고명섭 2023. 11. 1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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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정학 대표자 스파이크먼
2차대전 중 집필한 국제전략서
전후 미국 세계 전략을 설계한 니컬러스 스파이크먼. 위키미디어 코먼스

강대국 지정학

세력균형을 통한 미국의 세계 전략

니컬러스 존 스파이크먼 지음, 김연지 ·강태중 ·모준영 ·신영환 옮김 l 글항아리 l 3만 8000원

니컬러스 스파이크먼(1893~1943)은 20세기 영미 지정학(geopolitics)을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강대국 지정학’(원제 ‘미국의 세계정치 전략’)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스파이크먼이 자신의 지정학에 입각해 미국의 세계 전략을 그린 책이다. 이 책은 전후 미국이 국제전략의 틀을 짜는 데 바이블과도 같은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냉혹한 현실주의 전략을 조언하는 이 고전적 저작이 우리말로 처음 번역돼 나왔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스파이크먼은 젊은 날 중동과 극동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하다 1920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예일대학으로 옮겨 국제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1930년대 이래 스파이크먼의 연구는 지정학에 입각한 국제정치에 집중됐는데 그 결과물이 1942년에 나온 ‘강대국 지정학’이다. 이 책을 발간하고 이듬해 스파이크먼은 세상을 떠났고, 또 다른 저작 ‘평화의 지정학’이 1944년 유고로 출간됐다. 스파이크먼의 지정학은 현대 지정학 창시자 해퍼드 존 매킨더(1861~1947)의 이론을 계승했다. 그러나 매킨더가 유라시아 복판인 하트랜드(심장지대)를 지정학의 중심으로 삼은 것과 달리, 스파이크먼은 그 하트랜드를 둘러싼 림랜드(연안지대)를 핵심으로 삼았다. 그 림랜드에 관한 논의는 ‘평화의 지정학’에 집약돼 있지만, ‘강대국 지정학’도 림랜드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책에서 스파이크먼이 펼치는 가장 기본적인 논의 구도는 ‘고립주의 대 개입주의’다. 19세기 이래 미국의 대외 전략은 이 두 노선을 양대 산맥으로 하여 전개됐다. 미국에서 줄곧 우세했던 것은 ‘고립주의’였다. 고립주의는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밝힌 ‘먼로 독트린’에서 처음 천명됐다. 미국이 유럽에 개입하지 않을 터이니 유럽도 아메리카대륙에 개입하지 말라는 선언이었다. 이 고립주의를 깨뜨린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미국은 전쟁 후기에 참전해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미국은 다시 고립주의로 돌아갔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안해 창설한 국제연맹에도 미국은 가입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에도 미국은 한동안 고립주의를 고집하다가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서야 전쟁에 직접 뛰어들었다.

스파이크먼은 ‘고립주의 대 개입주의’를 둘러싼 미국 내 논쟁이 미국의 지정학적 조건과 직접 관련돼 있다고 말한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대양으로 보호받고 있기에 외부의 침략을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고, 첫 번째 방어선을 미국의 동서 해안으로 설정하면 된다는 것이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다. 반면에 개입주의자들은 대서양이나 태평양은 방어벽이 아니라 일종의 해상 고속도로여서 적국의 해군력에 언제든 뚫릴 수 있으므로 첫 번째 방어선을 미국의 해안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해안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노선 가운데 어느 쪽에 서느냐가 다른 모든 하위 전략을 결정한다. 스파이크먼은 단호하게 개입주의 전략을 옹호한다.

스파이크먼이 이 책에서 내놓는 또 다른 핵심 주장은 국제관계에서 언제나 ‘힘의 정치’(power politics)가 지배한다는 원칙이다.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도덕이나 정의가 아니라 힘이다. “정의·공정·관용의 가치는 힘의 추구를 위한 도덕적 정당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지만, 그것들의 적용이 약점이 되는 순간 폐기해야 한다.” 도덕적 가치는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이런 냉정한 현실주의 원칙에 입각해 스파이크먼은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미국이 개입주의 노선을 관철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처럼 고립주의로 돌아가면 미국의 안전이 다시 위협받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하는가. 여기서 스파이크먼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국내 정치에 적용한 처방을 끌어들인다. 국부들이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는 정부를 만들어 힘이 한곳으로 쏠리지 않게 했듯이, 국제정치에서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럽이든 아시아든 특정 국가 또는 특정 세력이 압도적인 힘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그 힘을 나누어 서로 견제하게 해야 한다. 그 방안의 하나로 스파이크먼이 제안하는 것이 독일을 분할하되 그 분할된 독일을 포함한 서유럽이 소련을 제어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 눈여겨볼 것은 전후 극동(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제안이다. 스파이크먼이 보기에 전후의 동아시아에서 강국으로 떠오를 곳이 중국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힘을 어떻게 억누르느냐가 관건이 된다. “과거 천자의 왕국이 지녔던 잠재력은 벚꽃의 나라에 비해 무한히 크다.” 이런 관점 위에서 스파이크먼은 일본을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스파이크먼이 이 책을 쓰던 시점에 일본은 독일과 함께 미국의 주적이었다. 그러나 미래를 보는 스파이크먼은 중국의 힘을 억제하려면 일본을 이용해야 하며, 그러려면 일본의 군사력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유럽에서 서유럽 지역이 미국의 첫 번째 방어선 구실을 하듯 극동에서 일본이 미국을 지키는 첫 번째 방어선 노릇을 하는 것, 그것이 미국에 최대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스파이크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의 안보와 국익을 최우선에 놓고 논의를 이어간다. 스파이크먼이 제안하는 국제전략은 고전적인 ‘분할 지배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영국의 사례를 거론한다. 영국은 해양력만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이 아니다. 배후의 유럽 국가들이 힘의 균형 속에서 서로 견제하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영국이 마음 놓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미국도 유라시아 전체를 세력균형 상태로 묶어두어야만 패권을 지킬 수 있다는 얘기다.

눈길을 끄는 것은 스파이크먼의 안중에 한반도는 없다는 사실이다. 전후에 동아시아에서 여러 독립국이 나올 것이라며 영국·네덜란드 식민지까지 거론하면서도 한반도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중국을 견제하려면 일본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만 두드러진다. 이런 맹목의 관점이 전후 미국의 국제전략 설계에 지침이 돼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의 근본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다. 미국의 국익과 한국의 국익이 일치하지 않음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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