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미·소 ‘장기 평화’ 아래 2천만 아시아인 죽음이 있다

최원형 2023. 11. 1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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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학자의 비판적인 냉전사 연구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 1945년부터 1990년 사이 냉전 시기를 물들인 전쟁과 폭력의 장면들. 이데아 제공

아시아 1945-1990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폴 토머스 체임벌린 지음, 김남섭 옮김 l 이데아 l 5만5000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전지구적 차원에서 서로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냉전’이 벌어졌다. 영향력 있는 냉전사가 존 루이스 개디스는 이 시기를 ‘장기 평화’(long peace)라 부르곤 했는데, 강대국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아 국제 질서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어떤 지역은 그 어느 시기보다 전쟁과 대량학살로 그득했던 ‘열전’을 경험해야 했다. 2차대전 종결부터 1990년 사이 2천만명 이상이 폭력적 충돌 과정에서 사망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냉전이란 살얼음은 실제론 수천만 명이 죽어나간 이 ‘킬링필드’들을 잘 보이지 않게 그저 덮고 있었을 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폴 토머스 체임벌린(컬럼비아대 교수)은 2018년 펴낸 ‘아시아 1945-1990’(원제 ‘The Cold War’s Killing Fields’)에서 “동쪽으로는 만주 평원, 남쪽으로는 인도차이나반도의 우거진 열대우림,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및 중동의 건조한 고원에 이르기까지 죽 이어지는 지대”, 곧 ‘아시아’에 초점을 맞춘다. “1945~1990년 사이 폭력적 충돌 과정에서 목숨을 빼앗긴 사람은 10명 중 일곱 명꼴로 이 지역에서 사망했다.” ‘장기 평화’라는 냉전이 어떤 지역에서는 열전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해온 바다. 지은이는 한걸음 더 깊이 들어가 이 시기 벌어진 광범한 폭력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 분석하고, 그것이 초강대국들의 세력권들이 맞닿은 ‘냉전 국경 지대’라 할 수 있는 아시아의 가장자리 지역들에서 벌어졌음을 지적한다.

아시아 남부 주변 지대에서 발생한 폭력의 지리적 집중. 이데아 제공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경쟁에 돌입한 미국과 소련은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중동을 거쳐 아시아 몬순 지대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인 ‘주변 지역’(rimland)을 완충지대로 삼고 서로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단지 초강대국들의 체스판이 아니라, 옛 유럽 제국들의 붕괴 이후 탄생한 포스트식민주의 세력들이 저마다 새로운 세계를 주조하고자 가열찬 탈식민지화 투쟁을 벌이고 있던 지역이기도 했다. “탈식민지화 과정이 지역 지배를 위한 초강대국 투쟁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개별적인 충돌들은 냉전이라는 전지구적 차원의 그물망에 붙들려 구조화됐다. 대규모 전쟁과 학살이 그 결과로 뒤따랐다.

지은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 가지 ‘전선’을 제시하는데, 제3세계 탈식민화를 이끌었던 공산주의 운동이 대두했다 몰락하고 인종·종교를 중심으로 삼는 종파주의가 이를 대체하는 과정이 이를 관통한다. 1945~1950년 중국 혁명은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아시아에서 막 발생하고 있던 냉전의 중대함에 눈뜨게 했”으나, 미국·영국·소련·중국이 4대 경찰국을 맡는다는 ‘얄타 체제’를 폐기하고 싶지 않았던 강대국들은 강하게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 한반도에서 발발한 한국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총공세’에 대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미국이 “개발 도상 세계에 대규모로 개입한 첫 번째 사례”를 만들었다. 일본·프랑스 식민주의가 끝난 뒤 새로운 주권국가를 만들려는 인도차이나의 공산주의 운동도 미국과 소련, 중국 등 강대국의 개입을 끌어들였다.

1951년 6월, 한국전쟁 당시 동생을 등에 업은 소녀가 M26 탱크 앞에 선 모습. 미국 해군 제공
1950년 9월15일 남한의 인천항에서 방파제를 공격하는 미군 해병들. 이데아 제공

1960~1979년 대두된 두 번째 전선은 ‘인도-아시아 대학살’이라 부를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제3세계를 휩쓴 공산주의 운동이 중·소 분쟁 등으로 퇴조에 들어선 가운데 인종적·종교적 정체성을 둘러싼 충돌이 기존의 정치 이념의 충돌 위에 덧씌워지고 점차 이를 대체한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공산주의 대학살은 그 서막이었다. 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로 분리)에서 벌인 학살,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크메르 루주의 살육은 ‘제노사이드’(인종청소)가 그 본질이었다. 강대국들은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각자의 이익에 따라 폭력의 판을 키웠다. 예컨대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중재를 맡아줄 파키스탄을 지원했는데, 이 미국·중국·파키스탄 연합은 이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가운데 ‘초국적 지하드(이슬람 성전) 운동’에 헌신하는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이 탄생하는 토양이 된다.

1975~1990년 냉전의 마지막 전선은 ‘대종파 반란’으로, 중동이 주된 전장이 된다. 1975년 발발한 레바논 내전부터 1979년 이란 혁명, 이란-이라크 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중동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종 간 다툼, 부족 정치, 종교 분쟁이 부채질한 이 새로운 전쟁은 반란자, 준군사조직원, 국제 평화유지군, 게릴라, 재래식 군대가 싸운 저강도 충돌”로 나타났다.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등 세속적 정치 이념에서 길을 찾지 못한 제3세계 혁명가들은 이제 종교와 인종을 토대로 삼는 ‘종파주의’에서 답을 찾았다. “냉전의 우선적 필요 때문에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은 거대한 종파 반란에 대해 애초에 발상이 잘못된 대응을 하면서 난투극에 참가”했는데, 이를테면 ‘신정국가’ 이란의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지하드주의자들에게는 소련과 맞서라며 원조와 무기를 제공하는 식이었다.

1975년 4월17일 캄보디아의 프놈펜이 공산군에게 함락되자, 수도에서 한 크메르루주 병사가 권총을 겨누며 상점주들에게 상점을 버리고 떠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데아 제공
1980년 10월17일 이라크 바스라에서 공습이 진행되는 동안 카룬강에 설치된 부교 근처의 개인 참호에 있는 이라크 병사들. 이데아 제공
1988년 8월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 발사기를 들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이데아 제공
1987년 2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교전 중인 시아파 무슬림 아말 민병대원. 이데아 제공

지은이는 이처럼 냉전 시기 초강대국들이 벌인 경쟁이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냈을 정도로 전지구적 차원의 대량 폭력·학살을 부채질했을 뿐 아니라, 포스트식민주의 제3세계가 추구했을 법한 세속적인 대안들을 파괴해 버렸다고 지적한다. “미국 지도자들은 제3세계 동맹자들에게서 민주주의보다 반공주의를 우선시”했고, “소련과 중국은 제3세계 혁명가들을 온건한 사회주의로부터 떼어내 좀 더 급진적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초강대국 투쟁이 제3세계에서 분출하는 데 일조했던 파괴적 동력은 냉전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21세기에 새로운 세대의 충돌을 위한 씨앗을 뿌렸다.” 세계 일부 지역은 ‘장기 평화’ 속에 번영을 이뤘고 미국은 냉전의 승자가 됐다. 그러나 이들이 부추긴 인종적·종교적 급진화의 씨앗은 전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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