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를 살려내다 [책&생각]
김명시 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
이춘 지음 l 산지니 l 2만3000원
“독립동맹은 임정과 협조…조선의 짠타크, 현대의 부랑(夫娘) 연안서 온 김명시 여장군담.”
일제의 패망과 조선 독립 직후인 1945년 12월, ‘동아일보’는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1907~1949)를 조선의 잔다르크, 현대의 여걸에 비유한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김명시가 새로운 국가 건설 노선을 밝히면서 “조선 사람은 민족반역자와 친일파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내용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명멸했다. 1919년 3·1 운동이 무참히 진압된 뒤 상당수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건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역사에 굵은 획을 새긴 이들이 많지만, 대다수는 무명의 헌신이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명사로 유관순이 알려져 있지만, 일제와 언론이 훨씬 더 주목한 인물은 김명시였다.
경남 마산의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 회원 이춘이 쓴 ‘김명시’는 역사의 뒤안길에 이름 없이 ‘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 김명시의 불꽃 생애를 오롯이 되살린 평전이다. 김명시의 고향 마산부터 조선반도와 중국 대륙의 만주·연안·상해까지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장대한 발자취와 해방정국의 격동을 되살린 역사서이기도 하다. 앞서 2019년 희망연대는 국가보훈처에 김명시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다. 보훈처는 “사망 경위 등 해방 뒤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두 차례나 퇴짜를 놨다. 희망연대는 끈질기게 김명시의 흔적을 쫓고, 뿔뿔이 흩어진 친족을 수소문했으며, 그가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증명해야 했다. 평범한 시민들의 자료 발굴과 물심양면 후원이 큰 힘이 됐다.
마침내 2022년, 김명시가 해방조국의 경기 부평경찰서에서 ‘좌익 척결’의 광풍 속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 73년 만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책에는 서훈 신청과 재심의 험난하고도 감동적인 과정도 함께 기록했다. 지은이는 역사학자나 전문 연구자가 아니다. 책을 쓴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지은이는 한겨레에 “희망연대가 김명시의 서훈을 추진하면서야 그런 인물이 있다는 걸 처음 알고 감동을 받았고, 유공자 서훈 과정에서 이념의 프리즘이 작동하는 것을 보고 그럴수록 김명시의 항일투쟁과 혁명적 삶을 꼭 쓰고 알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밝혔다.
김명시는 가난한 선비 집안의 5남매 중 3녀였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간 데 이어, 열두 살이던 1919년에는 생선 장수로 살림을 꾸리던 어머니마저 3·1 운동의 격랑에 희생됐다. 3·1 운동은 김명시에게 엄혹한 현실을 일깨운 학교였다. “야수처럼 총칼을 휘두르는 일본 경찰과 군대를 보았다. 나라 빼앗긴 민중의 피맺힌 한과 눈물을 보았다. 멸시당하고 천대받던 이웃들이 성난 파도가 되어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김명시와 그 남매들은 곧장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명시는 10대 중반에 야학과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마치고 ‘직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에 눈을 떴다. 18살이던 1925년, 김명시는 코민테른 유학생으로 선발돼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4년간 공부한 뒤 귀국해, 1929년부터 조선을 넘나들며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그에게 독립운동, 반제국주의 혁명, 노동자·여성 해방은 별개가 아닌 하나였다.
1930년 중국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 습격 사건의 선봉대에서 김명시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1932년 봄에는 상하이에서 만든 코민테른 기관지를 국내에 배포했고, 인천 제물포 성냥공장 여공들의 교육과 파업을 지도했다. 그러던 중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으로 체포됐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다수의 체포자 중에도 김명시에 주목하며 “비거비래(飛去飛來) 홍일점 투사”로 묘사했다. 훨훨 날아다녔다는 이야기다. 해방 뒤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던 김명시의 전설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마침 임신 중이던 김명시는 경찰 신문과정에서 혹독한 매질을 당해 유산하고 말았다. 김명시는 16개월 뒤에야 열린 재판에서 자신이 당한 고문보다 동지들이 모진 고문으로 숨진 사건을 폭로하며 법정 투쟁을 벌였다. 1933년 9월 ‘동아일보’는 김명시가 주소, 성명, 직업을 묻는 재판장에게 “주소는 신의주형무소, 호주는 조선공산당 김형선(오빠), 직업은 혁명운동”이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김명시는 스물다섯부터 서른둘까지 꼬박 7년, 청춘을 옥중에서 빼앗겼다.
1939년에 출소한 김명시는 곧장 일본군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던 중국 팔로군을 찾아가 그 지휘를 받던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했다. 김명시는 독립동맹의 군사기구 조선의용군의 여성 전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장군’으로 불릴 만큼 출중한 지휘관이었다. 김원봉과 무정이 이끈 조선의용군은 1940년대 들어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했을 만큼 최후까지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해방 뒤 북한에선 ‘연안파’로 숙청됐고, 남한에선 ‘좌익단체’로 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김명시는 1945년 12월 독립동맹 간부들과 귀국해 새 조국 건설에 힘을 쏟았다. 김명시는 건국동맹의 여운형과 조선독립동맹의 무정을 잇는 직접 연락책이었다. 건국동맹의 인력과 자원은 고스란히 건국준비위원회의 발판이 됐다. 김명시는 모든 집회에 불려 다니는 인기 연사였고 토론자로도 탁월했다. 진취적인 여성들 사이에서 김명시는 영웅이고 최고의 롤모델이었다. 1946년 11월 ‘독립신보’가 연재한 ‘여류 혁명가를 찾아서’라는 인터뷰에서 기자는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골,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 대담해 보였다. (…) 혁명에 앞장서 싸우는 것이란 진실로 저렇게 비참하고도 신명나는 일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일어나 나왔다”고 썼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과 희망은 짧았고 좌우 분열은 깊었다. 그 틈에서 분단과 전쟁의 비극이 싹텄다. 남쪽에선 미군정과 친일에 뿌리를 둔 친미반공 세력이 좌파 계열 단체들을 불법화하고 탄압했다. 많은 좌익 인사들이 암살당하거나 몸을 숨기거나 월북했다. 수많은 언론에 보도될 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던 김명시도 1947년 여름 수배자가 돼 잠적했다.
그로부터 2년3개월이 지난 1949년 10월, 신문들이 일제히 김명시의 부고를 전했다. 앞서 9월 김명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에서 체포됐고, 한 달 뒤 경기 부평 경찰서 유치장에서 목을 맸다는 보도였다. 이례적으로 내무부장관 김효석이 기자회견을 열어 김명시의 자살을 발표했으나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김명시의 체포 과정과 죽음, 심지어 그의 주검이 어디에 어떻게 수습됐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직계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친족들은 연좌제의 사슬에서 숨죽이고 살았다. 지은이는 “김명시의 독립유공자 서훈 과정에서 그 친가와 외가가 120년만에야 서로를 찾고 끌어안았다”며 “김명시의 삶과 죽음이 곧 한국현대사”라고 밝혔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사진 이춘·산지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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